서기 304년부터 중국은 선비·흉노·갈·저·강족 등 5호들이 세운 16개국으로 혼란에 빠졌다. 386년에 건국된 북위가 북중국을 통일하면서 혼란이 다소 수습됐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예전처럼 중국을 향한 서진 정책을 밀어붙일 수 없게 됐다. 427년 고구려 장수왕(재위 : 413~491)은 400여 년간 도읍지였던 국내성을 떠나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 한성백제 최후의 날
이에 대응해 백제 제21대 개로왕(재위 : 455~475)은 472년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협공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북위는 개로왕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백제는 외교적으로도 고립되는 상황에 놓였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전경
평양의 방어망을 구축할 필요를 느낀 82세의 장수왕 거련(巨連)은 결국 475년 9월 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여 수도인 위례성(현재 풍납토성)을 강타하였다.
개로왕은 태자 문주를 신라로 보내 구원군을 청했고, 항쟁했지만 불과 7일 만에 북성 위례성이 함락되었다. 남성(몽촌토성)으로 도주한 개로왕은 탈출을 시도했으나, 아차산성에서 고구려 군에게 붙잡혀 치욕적인 죽음을 맞았다.
개로왕의 죽음은 고구려에게는 남진 정책의 중요한 발판을 마련해 준 승리였지만, 백제는 멸망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한성백제는 백제의 678년 역사 중 493년간(기원전 18년경~475년) 서울(한성)에 수도를 두었던 시기로, 역대 31명의 국왕 중 무려 21명이 한성백제 시기의 국왕이다.
제25회 한성백제문화제 포스터
개로왕을 끝으로 절치부심 한성을 되찾으려는 백제의 꿈은 끝내 이뤄지지 못한 채, 결국 위례성은 폐허가 됐다.
◆ 웅진 천도 그리고 해구의 쿠데타
475년 9월, 22대 왕으로 즉위한 문주왕(재위 : 475~477)은 한성을 포기하고 10월 장수왕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천혜의 방어진 곰나루 웅진(공주)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개로왕이 전사하고 수도 한성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왕의 권위는 한없이 추락했다. 그리고 그 결과 일어난 것이 해구(?~?)의 반란이었다.
문주왕은 476년 8월 해구는 지금의 국방부 장관인 병관좌평으로 중용했다. 하지만 해구를 중심으로 외척세력들이 왕권을 능가하는 힘을 행사했고, 결국 왕권과 해씨 가문의 충돌로 이어졌다.
공주시 웅진동에 위치하고 있는 공산성
해씨 세력에게 휘둘리던 문주왕은 477년 4월 일본에 머무르던 동생 곤지(?~477)를 귀국시켜 내신좌평에, 13살이 된 맏아들 삼근을 태자로 책봉하며 왕권 안정에 힘썼다.
그러나 곤지는 귀국한지 석 달 만에 해구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해구는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딴마음을 품었다. 왕권이 너무 허약해서 욕심을 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477년 9월에 문주왕이 사냥하러 나갔다가 궁궐 밖에서 묵었는데, 해구가 도적을 시켜 왕을 시해하고는 곧 국정을 장악하였다.
◆ 15세 소년 삼근왕의 의문사
문주왕까지 제거한 해구는 그의 아들 삼근을 다음 왕으로 세운다. 그의 나이 불과 13세였기 때문에 사실상의 모든 권력은 해구의 손에 들어왔다. 어린 왕을 좌지우지하는 해구의 전횡에 진씨 등 다른 귀족들이 반발한 것은 불문가지였다.
진씨 세력의 반격으로 인해 위기에 몰린 해구는 478년 봄 무리를 모아 근거지인 대두성에서 반란을 꾀했으나 진로(?~497)등 진씨 세력에 의해 잇달아 공격을 받고 대두성이 함락되면서 해구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공주 왕릉원 2호분에서 출토된 삼근왕의 장신구
공주 왕릉원 2호분에서 출토된 삼근왕의 어금니로 추정되는 치아
삼근왕은 재위 당시 477~478년은 권신 해구가, 478~479년은 진로가 정권을 좌우했고, 재위 3년째인 479년 11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삼국사기」는 "갑자기 서거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삼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석연치 않은 대목이 있다. 비록 삼근왕이 해구의 반란을 진압했지만 한계가 분명했다. 원칙적으로는 해구가 옹립한 군왕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구의 반란을 진압한 진씨 세력에 의해 폐위·살해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모대, 형 사마를 제치고 왕이 되다
삼근왕이 갑자기 죽자 일본에 체류 중이던 곤지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모대가 동성왕(재위 : 479~501)으로 즉위했다.
해구의 반란을 진압한 것은 진씨 세력이었고, 삼근왕의 후계자로 형인 사마(무령왕)를 제치고 동생인 모대를 선택한 것 역시 아마도 진씨 세력이었을 것이다. 왜국에서 자란 어린 모대를 허수아비 임금으로 세우고 권력을 장악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즉위 초 동성왕은 진씨 세력의 도움을 받으며 조용히 기반을 다졌다. 외교와 국방에 전념하면서 자신만의 세력을 키워 나갔다.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진로를 병관좌평에 임명한 것도 사실은 계산된 수였다.
그리고 동성왕은 웅진 지역의 신진 세력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기 시작했다. 동성왕은 사씨,연씨, 백씨 같은 금강 유역에 기반을 둔 가문들을 중앙 정계로 끌어들였다. 기존의 한성에서 내려 온 구 귀족들과는 완전히 다른 출신이었다.
동성왕은 486년 2월, 한성 옛 귀족들 대신 웅진을 본거지로 했던 백가(?~502)를 '위사좌평'(경호실장)에 임명 중용했다.
금강 유역에 토착적 기반을 가진 새로운 세력을 등용함으로써, 신구 세력의 조정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고, 나아가 친정 체제를 구축했다.
◆ 488년 백제-북위 전쟁
백제가 중국 대륙에 진출한 것은 근초고왕(재위 : 346~374), 근구수왕(재위 : 375~384) 대에 이룩되었다. 동성왕은 즉위 후 백제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486년 3월 남제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백제가 남제와 결탁하여 요서 지역의 옛 땅을 회복하려 하자, 북위는 무력으로 백제를 응징하려 했다. 그래서 북위는 488년에 백제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백제군의 강력한 방어진을 뚫지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삼국사기」는 동성왕 10년(488년) 기사에서 '위나라가 우리를 침공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라고 기록하였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도 '영명6년(488년) 북위가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 패했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요서, 진평 2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 25사 중 하나인 「남제서」에는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488년 당시 북위는 당시 수도였던 평성(중국 산서성 대동시)에서 태행산맥을 넘어 오늘날 북경시 밀운구 동북쪽의 백제 광양군을 공격했다.
이에 동성왕은 저근(?~?), 부여고(?~?) 등 4명의 장군들을 보내 대승을 거두었고 이 전쟁에서 중앙군을 이끌었던 저근 등 4인의 장수는 모두 왕과 제후로 봉해졌다고 기록했다.
◆ 490년 백제-북위 전쟁
「남제서」에 따르면 490년에도 북위가 백제를 침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488년 전쟁보다 더욱 규모가 컸다.
북위가 수십만 명의 기병을 동원해 백제를 공격했는데 동성왕이 장수들을 파견하여 역습을 가해 북위를 패퇴시켰다. 이로 인해 "바닷물이 들끓듯"했다. 서해상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백제는 여세를 몰아 북위의 잔존 병력을 계속 추격했다. 적을 쫓아가 베니 시체가 온 들판을 붉게 물들었다(乘奔追斬 ?尸丹野)’고 부연한다. 이는 백제군이 북위 땅에 상륙해 승리를 거뒀음을 의미한다.
서기 490년 당시 발생한 제2차 백제-북위 전쟁 당시 상황도
그리고 동성왕은 큰 전공을 세운 장수들을 각각 광양태수, 청하태수, 성양태수, 광릉태수로 책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미완의 영웅 동성왕
동성왕은 두 차례 북위와의 전쟁을 모두 승리하며 정복한 대륙의 땅을 백제 영토로 편입한다. 그 땅은 대륙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한 지금의 산둥성 일대이다. 일부는 강소성 북부까지를 포함한다. 실로 방대한 땅이다.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조선 역사에서 바다 건너 대륙에 영토를 두었던 때는 백제 근초고왕과 동성왕의 두 시대뿐"이라고 했다.
이 같은 사실들이 역대 중국 왕조들이 편찬한 정사(正史)에 엄연히 적혀 있지만, 오늘날 주류 역사학계 에서는 사료의 신빙성 문제로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493년(동성왕 15)에는 신라와의 외교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신라와 혼인 동맹을 맺어 신라의 이찬 비지(?~?)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498년(동성왕 20)에는 공물과 세금을 바치지 않는 탐라국(지금의 제주도)을 친히 정벌하고자 무진주(지금의 광주)에 이르렀다가, 탐라국의 항복을 받고 무력에 의한 정벌을 그만두고 탐라국을 속국화했다.
◆ 대궐 문을 닫아 버렸다
동성왕은 시간이 흐르자 초심을 잃었다. 497년(동성왕 19), 연돌(?~?)을 병관좌평에 임명하면서부터 소수의 측근을 통한 권력의 집중을 추구하게 된다.
499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많이 일어났다. 백성 2천 명이 고구려로 달아나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동성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백제 동성왕 때 지은 임류각은 왕과 신하들의 연회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누각은 고증을 거쳐 1993년에 재현됐다.
500년(동성왕 22)에 궁성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세우고, 그 주변에 연못을 만들어 기이한 짐승을 기르고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살기 어려워진 백성은 고향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달아나거나 도적이 되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이에 신하들이 상소를 올렸으나 동성왕은 듣지 아니하고, 대궐 문을 닫아 버렸다.
◆ 백가의 동성왕 시해
병관좌평 연돌과 위사좌평 백가는 왕의 신임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경쟁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가가 이 권력투쟁에서 밀렸던 것일까. 백가는 501년(동성왕 23) 8월, 가림성 성주로 발령받는다.
15년간 동성왕 곁에서 권력을 누린 백가에게 가림성 발령은 지방 좌천이나 다름없었다. 백가는 병을 핑계로 가지 않으려 했지만 동성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가림성은 현재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성흥산에 자리하고 있으며,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과 사비를 방어하기 위해 동성왕 23년(501)에 위사좌평 ‘백가’가 쌓은 석성(石城)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4호로 지정되었다. / 하트나무’로 유명한 부여 가림성 느티나무이다.
백가는 어쩔 수 없이 가림성으로 갔으나 왕에게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다. 결국 501년 11월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동성왕은 평소처럼 사냥에 나섰다. 그날의 사냥은 단순한 사냥이 아니었다.
이 시기 동성왕은 사비(부여) 천도도 계획하고 있었다. 동성왕이 향한 곳은 평소 천도 후보지로 마음속에 품고 있던 사비 서쪽 벌판이었다. 하지만 천도는 기존 세력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일이었고 특히 웅진을 기반으로 한 귀족들의 반발이 심했다.
동성왕이 사비에서 사냥을 하다가 큰 눈이 내려 길이 막히는 바람에 마포촌(충남 서천군 한산면)에서 머물게 되었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백가는 이때를 틈타 자객을 보내 왕을 시해했다. 동성왕은 중상을 입었고 웅진성으로 돌아온 후 12월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
◆ 무령왕의 즉위, 백가의 반란
그런데 「일본서기」는 동성왕 시해를 주도한 세력이 무령왕을 추대한 백제의 지배층이라고 밝히고 있다. 백가와 귀족들의 결탁은 동성왕이 집권 후반기 향락 생활에 빠져들면서 그 징후를 드러냈다.
501년 12월 동성왕의 직계가 등극하지 않고 이복형인 사마가 40세의 나이로 제25대 무령왕(재위 : 501~523)으로 즉위한다. 비록 무령왕은 백가와 귀족들의 추대로 왕이 되긴 했지만 동성왕 시해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동성왕 시해에 무령왕이 개입했다는 직접 근거는 없지만, 최대 수혜자는 무령왕이다. 무령왕은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고, 모든 걸 백가의 단독 범행으로 몰아가서 자기 부담을 덜려고 했던 것이다.
백씨세력의 무덤군으로 추정되는 공주 수촌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금제 귀걸이.
이에 무령왕과 그의 지지세력이 동성왕의 시해에 대한 책임 추궁을 구실로 백가세력을 견제하고 나서자 형세가 불리해진 백가가 이듬해 정월 가림성에서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무령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백가의 반란을 반드시 진압해야 했다. 무령왕은 직접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백가는 전력의 한계 때문인지, 자신의 죄가 참형에 이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저항을 포기하고 가림성 밖으로 나와 항복을 선택했다.
하지만 무령왕은 백가가 선왕을 시해한 반역자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그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단호하게 처형함으로써 실추된 왕권을 다시 세우고,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백가의 시신은 백강(지금의 금강)에 버려졌고, 동성왕 피습 사건은 백가의 단독범행으로 결론 내려져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