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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콘텐츠⑫] '짐이 곧 국가다'

관리자 2023-07-03 10:12:32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통해 의회를 구성하는 법안인 '중추원 신관제(中樞院 新官制·의회설립법)'를 제정하고 황제의 재가를 얻어 11월 4일 공포했다. 

11월 5일에는 중추원 신관제에 따라 의회를 개원하기로 하였다.

◆ "이 사람이 국왕이라니!..."

그런데 11월 4일 밤,  '익명서(벽보)'가 서울 광화문과 시내 곳곳에 게시됐다. 


익명서 내용은 "조선왕조가 쇠퇴하였으니 만민이 합심하여 윤치호(1865~1945)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면 정부와 국민이 개명진보를 이룰 것"이라고 적혀있었다.  




윤치호, 서재필, 이승만, 조병식, 홍종우


이는 조병식(1823~1907)등 친러파가 기획한 '익명서 조작'이었다.

친러파 조병식 무리는 황제에게 '익명서'를 올리면서, 독립협회가 황권을 폐하고 공화제 국가를 만들려고 한다고 무고했다. 

이에 격분한 황제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부추겨 현혹시키는 거짓말 집단"이라며 독립협회 해산과 독립협회 지도자에 대해 체포명령을 내렸다.  

아울러 '헌의 6조'에 찬성 서명한 대신들을 파면시키는 동시에 익명서 조작의 주역 조병식을 중심으로 한 친러 내각을 구성하였다.

독립협회 17명의 지도자들은 경성부 외곽에 숨었으나 결국 경무청 형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체포를 면한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고종 황제에 대한 배신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 사람이 국왕이라니!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어떤 배신자도 대한의 황제보다 더 천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 어용단체 '황국협회' 결성

황제는 독립협회를 대신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친위 조직이 필요했다. 이는 1898년 6월 30일 황국협회의 결성으로 현실화되었다. 

황국협회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장사하던 '장돌뱅이', 즉 보부상들의 조직체로, 임금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만든 어용단체(御用團體)의 전형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했을 때 보부상들은 조선 정부의 후원을 받으며 정부군과 함께 동학농민군 토벌에 앞장서기도 했다.

1898년 7월 7일 황국협회 발회식에서 구리패찰과 은으로 제작된 회표를 보부상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회표는 팔각 모양으로 태극문양에 '보호황실(保護皇室)' 네 글자를 새겨 정체성을 확연히 드러냈다.





황국협회 보부상 신표(회표)


황국협회는 황실 측근 세력이 주도했지만, 김옥균을 암살했던 홍종우(1850~1913)가 협회의 이념과 정책 방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 홍종우의 변신...프랑스 유학생, 암살자, 테러 정객

11월 5일부터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경무청 앞에서 철야시위가 계속되었다. 만민공동회 참가자가 수만 명에 이르자, 황제는 크게 당황했다.

11월 9일 군부대신 유기환(?~?)이 친위대 2개 중대 병력을 투입해서 탄압을 획책했다가 실패했다. 

만민공동회 6일째인 11월 10일에 황제는 조병식·유기환 등을 해임하였고, 구속자 17명 전원을 즉각 석방하였다.  

그러나 만민공동회는 해산하지 않고 익명서를 조작한 조병식 등의 처벌과 헌의 6조 실시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이어갔다.

이런 가운데 황제와 친러수구파들은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기 위해, 전국의 보부상들을 서울로 불러 들였다. 황국협회 세력을 이용하여 만민공동회 공격을 계획한 것이다.

11월 21일, 보부상들은 종로에서 대회를 열고, 홍종우가 등단하여 선동연설을 한 다음 "일제히 진격하여 만민공동회를 쳐부수자"고 외쳤다.

보부상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호응했다. 길영수(?~?)와 홍종우의 지휘 아래 몽둥이로 무장한 2천여 명의 보부상들이 만민공동회 대회장을 습격했다.

황실 수비대인 시위대가 황제의 칙령을 비밀리에 받아 황국협회를 인도했다.

이날 급습으로 사망자 한 명, 부상자는 수 없이 나올 만큼 격렬한 충돌이 빚어졌고, 대회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김덕구의 만민장. ‘대한제국의사광산김공덕구지구(大韓帝國義士光山金公德九之柩)’라고 쓴 명정(銘旌)을 여러 개 세웠으며, 그 다음 상여가 따랐다. 


12월 1일 보부상 패거리에 맞아 죽은 구두수선공 김덕구의 장례를 만민장(萬民葬)으로 거행했다. 이어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다시 열고 철야 상소시위가 재개되었다.

◆ "군대를 동원하여 본때를 보여주시라"

12월 17일 민영기(1858~1927)등이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킬 것을 진언함에 따라, 황제는 각국 공사들을 불러 의견을 타진하였다.

외국의 공사들은 순검(경찰)을 이용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도록 권고하였다. 

황제는 순검의 힘이 약하니 군대로써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킴이 어떠한가를 물었으나, 외국 공사들은 찬성하지 않았다.

12월 18일 일본 공사 '가토 마스오'가 황제를 단독 면담했다. 황제는 가토에게 "군대로 민회를 해산하는 것이 어떠한가"를 물었다.

일본은 침략 정책 수행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저항 세력으로 판단했다. 일본공사 가토가 노린 것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붕괴였다.  

가토는 "메이지유신 때도 병사들이 민회를 제압했다"며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일거에 탄압할 것을 적극 권유하였다.

황제는 가토의 진언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마침내 황제는 12월 23일에 군대와 보부상을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키면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지도자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에 나섰다.





1898년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체포돼 종로 한성감옥에 수감됐던 독립협회 간부들. 앞줄 오른쪽부터 이정식, 이상재, 홍재기, 강원달, 뒤쪽 오른쪽부터 부친 대신 복역했던 소년, 안국선, 김린, 유동근, 이승인. 왼쪽 끝에 따로 서 있는 사람은 이승만이다. 이들은 1904년에 출옥했다. 


독립협회 간부들은 체포됐다. 이들은 6년이 지난 1904년에야 석방됐다. 

황제는 곧바로 황제권 강화 작업에 돌입했다. 1899년 4월에는 갑오경장 때 폐지했던 연좌제를 부활시키려고 했다.

국내는 물론 일본으로 망명 중인 개화파 국사범들의 가족까지 멸족시키겠다는 의도였다. 이는 당시 주재했던 외국 공사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 「대한국국제」... 1인 독재 체제의 완성

1899년 6월 23일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 법률 제정 작업을 명했다. 

7월 황명에 의해 '법규교정소'라는 기관이 설립되고 8월 17일 대한제국의 헌법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9조목을 공포했다. 

제1조에는 자주독립을 천명했지만 2조부터 9조까지 황제의 전제정치를 합법화하였다. 황제는 육군과 해군을 통솔하고 계엄과 해엄을 명할 수 있다.

또한 법률의 제정과 반포, 집행을 명할 수 있고 사면과 특사, 감형과 복권도 황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행정각부의 관제와 봉급을 제정하고 개정하는 것도 자의로 행할 수 있으며, 칙령 또한 마음대로 발동할 수 있다.

게다가 문무관의 임명과 해임, 각 국과의  강화 및 조약체결도 황제가 독단적으로 할 수 있다. 

즉 「대한국국제」는 오로지 황제가 모든 권력과 권리를 가지며 백성은 복종의 의무만 있다고 규정했다. 법적으로 완벽한 고종 1인 독재 체제의 완성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외교관은 "이 나라는 현재의 혼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이 법안을 들고 온 법규교정소 총재 윤용선(1829~?)은 고종에게 "외국인 또한 옳다고 한다"고 보고했다.





대한제국 헌법 '대한국국제' / 을사5적 이근택, 권중현, 이지용, 이완용, 박제순


자신의 무한한 권력을 인정하는 「대한국국제」를 보고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황제에게 「대한국국제」를 만들어 올린 자들 역시 고종과 한통속이었다.

고종 황제는 1905년 을사늑약 당시 이토 히로부미가 조약을 강요했을 때, 이토로부터 조롱을 당한다.

고종 황제는 "짐은 지금 스스로 이를 결정할 수 없다. 짐의 전 · 현직 정부 신료와 상의하여 자문을 구하고 또 백성들의 의향도 살필 필요가 있다"고 하자. 

이토는 「대한국국제」를 거론하며 "백성들의 의향을 살핀다는 건 기괴하기 짝이 없다. 대한제국은 황제에게만 주권이 있는 전제군주정이 아닌가. 폐하가 결정하면 그게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