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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콘텐츠⑩] 전제 군주제 기반, 대한제국의 탄생

관리자 2023-06-02 10:07:18
환궁 직후인 1897년 5월부터 칭제건원(스스로 황제가 되어 연호를 세우는 것)을 요청하는 상소가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9월에는 관원 716명이 황제로 칭할 것을 연명으로 상소문을 올렸다. 10월 1일부터 3일까지 심순택(1824~1906)과 조병세(1827~1905)가 백관들을 이끌고 나섰다. 

3일 내내 하루에 네 시간씩 무릎 꿇고 간청하며 아홉 번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아홉 번째 상소를 받아들였다.

◆ 청나라로부터 독립한다면서, 청나라 풍 건물로

이제 황제국이 되었으니 천신께 제를 올려야 한다. 10월 1일 고종은 청나라 사신 숙소인 옛 남별궁 자리에 환구단(현 조선호텔)을 지으라고 명했다.





환구단과 황궁우(1907년 추정사진) 오른 쪽 둥근 환구단 모습이 뚜렸하다.


왕실 최고 도편수였던 심의석(1854~1924) 설계로 10월 2일 착공하여, 천여 명 인력을 동원 10일 만에 완공했다. 

천지신과 태조 이성계 신위를 모실 황궁우(皇穹宇)는 아예 만들지도 못했다. 황궁우는 이듬해 9월 3일 착공해 1899년 12월 완공됐다. 


화강암 기단에 돌난간을 둘러 세운 3층 팔각집이다. 천장엔 황제의 상징인 칠조룡(七爪龍)을 새겨넣었다. 




아치형 삼문, 황궁우, 석고, 황궁우 천장의 칠조룡



황궁우의 건물 층 구성과 검은 벽돌로 지은 아치형 삼문의 지붕 모양과 벽돌쌓기도 전형적인 청나라 풍이다. 

청나라로부터 독립한다면서, 청나라 풍 건물로 칭제의 상징을 삼은 것이다. 

◆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겠노라"

1897년 10월 12일 새벽 2시, 원구단에 나아가 하늘에 고하고 황제에 오른다. 10월 13일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임금을 '황제'로 칭한다고 선포하였다.

고종은 제국을 선포하면서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겠노라(欲革舊而圖新·욕혁구이도신)"고 선언했다.

칭제건원은 독립국가 조선이 입헌군주제를 통한 개혁 시발점이었다. 그런데 공화정커녕 의회가 있는 입헌군주제로 나아갈 생각조차 없다.

황제에 오르고서 단행한 첫 일이 민 왕후의 장례식이다. 그것도 당시 재정 능력에 비춰,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말이다.

◆ '오천육장(五遷六葬)'...다섯 번 이장하고 여섯 번 장사 치르다


1858년 민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치록(1799~1858)이 죽었을 때 여주 선영에 안장되었다. 비록 몰락하였지만 명문가 선영이라 지세가 좋았다.




1.충남 보령에 있던 명성황후 부친 민치록의 묘 2.같은 묘가 2003년 이장되고 난 뒤 폐허가 된 모습. 3.경기 여주로 이장된 민치록의 묘 모습.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왕비가 되자마자 풍수지리설에 따라 아버지 묘를 제천, 이천, 광주를 거쳐 1894년에는 충남 보령 바닷가로 이장했다.

이장을 거듭할수록 국고는 탕진되었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전답을 빼앗기고 정든 고향에서 쫓겨났다. 

1894년  보령으로 이장한 뒤 다시 110년 후의 일이다. 2003년 원래 초장지인 여주 가남읍 안금2리에 이장되었다.

다섯 번 이장하고 여섯 번 장사를 치른 이른바 '오천육장(五遷六葬)'의 진기한 이력의 묘다.

◆ "김홍집이 그 일을 주관했기..."

충남 보령 이장 다음 해인 1895년 10월 8일 새벽 광화문을 통해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인 낭인들은 궁궐 최북단 건청궁으로 들어가 조선의 왕비를 살해했다.

건청궁 옆 녹산(鹿山) 언덕에 왕비, 궁녀들 시신을 모아놓고 불태웠다. 

1895년 10월 15일에 고종은 민왕후의 승하를 반포했다. 10월 19일에 왕후의 유해를 재궁(梓宮, 관)에 넣었다. 





민왕후를 시해한 건청궁 옥호루, 시신을 불태운 녹산


10월 22일에는 민 왕후의 시호를 '순경(純敬)'으로, 능호를 '숙릉(肅陵)'으로 했다. 

동구릉 숭릉(崇陵, 18대 현종 내외의 능) 근처에 능을 조성하였으나 고종의 아관망명으로 중단되었다.

아관망명 중인 1897년 1월 3일에 의정부에서 민 왕후의 시호를 다시 정할 것을 상소했다. 

"역신(逆臣) 김홍집(1842~1896)이 그 일을 주관했기 때문에 의식 절차가 미비하고 모자람이 있었으니 다시 정하소서.”

1월 6일, 고종은 의정부에서 올린 그대로 시호는 '문성(文成)', 능호는 '홍릉(洪陵)'으로 정했다. 

3월 2일, 고종은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는 정종(正宗)의 시호와 같기 때문에 민왕후의 시호를 ‘명성(明成)’으로 고쳤다. 

10월 12일 제국의 탄생으로 고종은 황제에 즉위했고 민 왕후도 명성황후로 추존하여 홍릉(洪陵)이라는 능호로 청량리 천장산아래 새장지로 정하고 능을 조성했다. 

◆ "장례비 100만달러...어떤 비용도 아끼지 않았다"

11월 21일에는 을미사변 이후 2년 동안 미뤄왔던 명성황후 국장이 치러졌다. 상여는 경운궁 인화문을 나와 황토현으로 북상한 뒤 종로를 지나 홍릉으로 떠나갔다.





명성황후 장례식, 발인 반차도


명성황후로 격상된 민 왕후의 장례식은 상여를 따라간 수행원이 4800명, 서양 외교관이 60명, 병사와 노동꾼이 9000명에 달하는 성대한 장례식이었다.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가 1897년 11월 21, 22일 명성황후의 국장에 참석한 뒤 미국 신문에 기고한 글 중 일부다. 

"이틀간 초 값만도 6500달러가 들었다고 한다. 언덕배기는 불빛으로 타올랐다.”

"시해된 명성황후의 유해를 엄청난 비용을 들여 장대한 의식으로 매장하는 장례가 시작됐다. 무덤 조성과 장례 의식의 총비용은 100만 달러에 가깝게 추산된다."

언더우드 여사가 1904년에 쓴 「상투쟁이들과의 15년」에도 밤중에 치른 명성황후의 장례식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왕후가 죽은 지 2년이 지난 지금에야 점쟁이들이 자꾸만 방향을 트는 바람에 돈을 무척 들인 뒤에 마침내 묘지가 결정되고 장례 날짜가 잡혔다."

"묘지로 정해진 땅은 동대문 밖으로 그 넓이는 몇 에이커나 되었다. 돈을 물쓰듯 했고, 위엄과 장중함을 갖추려고 어떤 비용도 아끼지 않았다."

이리하여 명성황후는 청량리 천장산 산줄기 아래 홍릉에 안장되었다.

◆ '무덤들을 모두 옮겨라.'

1900년 6월 21일, 이재순(1851~1904)이 모두가 홍릉이 완전무결한 길지가 아니라고 하니, 나라의 기반이 공고해지도록 홍릉을 옮길 것을 청하였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천장산 산줄기 아래에 22년간 안장되었다가, 1919년 고종 승하 후  남양주 금곡동 현 홍릉으로 합장되었다.


6월 24일 고종은 "임시로 쓴 묫자리"라며 "도감을 설치하여 거행하라."고 하였다. 비극적으로 죽은 왕비 능이 제국의 운명을 저해하고 있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7월 11일 묫자리로 양주에 있는 금곡, 군장리, 차유고개와 화접동이 그 후보지였다. 8월 24일 금곡으로 정하였다. 

그런데 9월 12일 금곡이 길지가 아니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고종은 원래 예정지였던 금곡도 놓으려 하지 않았다. 9월 21일 조령을 내렸다.

'금곡 새 능의 터 내에 있는 종친과 신하들의 무덤은 예우하여 옮겨가게 하라.' 「매천야록」에 따르면 금곡리에 있던 무덤 2만여 기가 이장됐다.

무덤의 주인들 가운데에는 세종 막내아들 영응대군(1434~1467)내외, 효순공주(1522~1538)내외를 비롯한 왕실 종친들, 세종 때 문신인 조말생(1370~1447)과 양주 조씨 문중 묘 110기가 밀집돼 있었다.

왕비릉 이장을 위해 왕자와 공주, 공신들의 묘를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하였으니 조선왕조 500년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10월 18일 관리들은 금곡리 옆 군장리가 상길지라고 보고했다. 10월 29일 군장리에 왕릉 예정지임을 알리는 봉표가 세워졌다. 

금곡리 무덤들을 다 이장하고, 군장리로 장지를 확정한 뒤 또 변고가 벌어졌다.

1901년 4월 10일 무덤 공사를 벌이던 군장리 묘터가 바위투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4월 21일 고종은 원래 예정지였던 금곡리를 최종 천장지로 확정했다.

◆ 나라가 사라지고 9년 뒤, 이장된 홍릉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67세로 승하했다. 일제는 고종의 능호를 허락하지 않았다. 능호를 허락한다는 것은 대한제국 황제의 신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금곡리에 있는 홍릉. 1919년 고종이 죽은 뒤 청량리에 있던 왕비 민씨릉을 옮겨와 금곡리에 합장했다. 조선식 정자각(丁字閣) 대신 중국 황제릉 형식의 일자(一字) 각이 세워져 있다.


1월 30일 남양주시 금곡에 능을 잡고 산역(山役)을 시작했다. 그날 명성황후가 묻힌 청량리 홍릉에서도 능을 파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다.

2월 16일 홍릉을 양주 금곡 현재의 자리로 옮긴데 이어 3월 4일 고종을 합장했다.

명성황후와 합장했으니 홍릉이라는 능호를 쓰는 것을 일제로서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