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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콘텐츠(57)] 쿠데타 이후 왕위찬탈까지 '20개월' ? 수양, 정치적 숙원 이뤘다
편집인
2026-07-16 16: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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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만에 세상이 바뀌었다.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김종서, 황보인 등 고명대신은 온데간데없고, 수양과 그 일파들이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다.
정변에 성공한 수양은 자신을 포함한 정난공신 43명을 책봉했다. 공신 책봉을 통해 수양은 새롭게 자신을 중심으로 친위 세력들을 편성하게 되었다. 태종(재위 1400~1418)이 피의 숙청으로 제거한 공신들의 세상이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공신이 되면 품계가 올라가는 것은 물론 토지와 노비 등 경제적 포상이 뒤따랐다. 게다가 공신의 자손들은 죄를 범해도 영원히 용서토록 하였고, 전각을 세워 초상을 그려 붙이게 했다. 이는 분명 역사의 역류였다.
◆ 반란이 반란을 부르다
이징옥의 6진 개척 기록화. 전쟁기념관
이징옥(?~1453)은 김종서와 더불어 6진을 개척했던 용장 중에 용장이었다. 6진 개척 과정에서 김종서가 드러난 공로자라면 이징옥은 숨은 공로자였다. 여하튼 이징옥은 김종서의 측근이었으므로 수양 측에서 볼 때는 제거 대상 1순위였다.
때마침 등장한 인물이 세종 시절에 김종서를 모함했던 평안우도 도절제사 박호문(?~1453)으로 그를 함길도 도절제사로 임명해 이징옥을 대신토록 했다.
박호문은 아들과 종자 두 명만을 거느리고 함길도로 가 이징옥에게 자신이 함길도 도절제사가 되었음을 통보했다. 이징옥은 일단 조정의 명에 응해 자리를 넘겨주고 군영을 떠났다.
귀경길에 오른 이징옥은 변방 방위의 중요한 직책을 정식 계통도 밟지 않고 도적처럼 몰래 와서 교대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군영으로 돌아간 이징옥은 박호문을 처단하고 박호문의 아들을 잡아 물었다.
이징옥은 박호문의 아들을 통해 수양이 정변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죽이고 단종을 무력화시켜 왕권을 장악했다는 것을 알았다. 분개한 이징옥은 군사를 일으켜 수양을 토벌하기로 결심했다.
이징옥은 군사를 모으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갔다. 여진족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치밀하게 준비된 수양의 반란에 비해 이징옥의 반란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 시작되었다.
◆ 허망한 죽음
이징옥의 거병 소식이 조정에 보고된 다음날 1453년(단종 1) 10월 26일 수양은 이를 계기로 도통사를 겸임해 군사에 대한 지휘권마저 장악했다.
또한 이징옥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우면 포상하겠다고 각지에 알리고, 여진족에게도 반란군에 동조하면 함께 토벌하겠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내렸다.
상황은 이징옥에게 불리했다. 왕명이 있자 이징옥에게 가담했던 군사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종성진 절제사 정종(1417~1476)은 휘하 군병들과 함께 이징옥을 제거해 살 길을 모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오랑캐에 항복을 받은 누각이란 뜻의 수항루는 종성읍성의 장대로 조선 초기 두만강으로 침범한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해 읍성을 쌓으면서 함께 세운 것이다. 원래 이름은 뇌천각이었지만 1608년 여진족을 무찌른 뒤 이것을 징표로 남기기 위해 수항루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정종은 이징옥에게 날이 몹시 추우니 군사들에게 술을 먹이기를 청했다. 이징옥이 승낙하자 정종은 먼저 차려온 작은 소반을 갖다 놓고서 술을 따라 이징옥에게 잔을 올렸다.
이징옥이 술잔을 들이키자 정종은 신호를 보냈고, 정종과 모의한 병사들이 활을 쏘아댔다. 이징옥이 화살을 맞고 달아나자 병사들이 쫓아가 살해했다. 이징옥의 최후였다.
죽은 이징옥에게 시신을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형을 더하였으며, 그의 머리는 3일 동안 효수되었다가 한양으로 보내졌다.
수양에 맞서려 했던 이징옥의 거병은 ‘이징옥의 난’으로 기록되었으며, 이징옥은 역신이 되어 역사에서 언급되어서는 아니 될 인물로 남았다.
1791년(정조 15) 관작이 회복되고 충강(忠剛)의 시호가 내려져 영월 장릉의 단종 배식단에 배향되었으나, 정조 사후 노론이 집권한 후에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고, 1908년(융희 2) 4월 복권되었다.
◆ 회맹제를 올리다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 밖에는 공신을 녹훈한 뒤 구리 쟁반에 담은 피를 나누며 충성을 맹세하는 회맹제를 치렀던 제단인 회맹단이 있다.
공신회맹단이라 했고 한양 북쪽에 있어서 북단으로 불렀다. 현재는 청와대 구역에 포함되어 있다. 정선(1676~1759)의 그림 '삼승조망도'와 '북단송음'에는 사각형 모양의 북단이 표시되어 있다.
삼승조망도 1704년 겸재 정선이 인왕산 기슭 이춘재의 저택 후원에 있는 삼승재에서 바라본 회맹단. 정 중앙 약간 위쪽 접혀진 곳에 회맹단이 있고 임진왜란때 볼탄 경복궁은 주춧돌만 남아 있다. 오늘날의 청와대 자리다.
1453년 11월 20일, 수양이 "이제 북방의 일이 일단락되었으니 회맹제를 올릴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형식은 단종이 정난공신을 대동하고 회맹제를 올리는 모양새를 취했으나 사실은 수양이 조카를 데리고 간 것이다.
「단종실록」에는 "단종이 공신을 거느리고 성북단에서 맹세하고 환궁하여 길복으로 경회루 아래에서 음복하였다. 그 서문(誓文, 서약을 담은 문서)은 이러하였다.“
"조선국왕 홍위는... 천지신명과 종묘사직, 산천백신의 영에게 고 하나이다. 내가 어린 나이에 대업을 이어... 간신 황보인·김종서 등이 조정의 질서를 어지럽히며... 이징옥과 결탁하여 모책을 꾸미는 것을 숙부께서 간흉을 전멸하고...
...군신이 한 몸이 되어 기쁜 일과 슬픈 일을 같이하여... 자손 만세토록 오늘을 잊지 말 것이되, 혹 어김이 있으면 신명이 반드시 죽일 것이니, 이 맹세를 마음에 간직하여 끝까지 변하지 말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양과 공신들의 힘으로 반란을 막은 점을 강조한 단종의 이 선언은 왕위를 물려주는 전주곡이 되고 말았다.
◆ 수양의 '단종 국혼' 기획
1454년(단종 2) 1월, 영의정 수양은 다시 단종을 찾아 국혼을 요청한다. 정변의 명분이 부족하다 보니 세간에는 조만간 숙부가 조카의 자리를 찬탈할 거라며 수군거리는 등 온갖 흉흉한 풍문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수양은 민심을 달래볼 요량으로 국혼을 추진한 것이었다. 이때는 이미 수양이 임금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단종도 거절할 수 없었다.
서용선 작가의 "백성들의 생각'
수양은 종친과 공신들에게 창덕궁에 나가 처녀를 간택하게 했다. 최종 후보에 오른 인물은 셋이었다. 셋 중에서 단종의 정비로 간택된 것은 정순왕후(1440~1521) 송씨였다.
송씨의 부친 송현수(?~1457)는 수양의 죽마고우였고, 궁중의 미곡을 관장하는 정6품 풍저창부사였다. 단종에게 힘이 되지 못할 처족을 고른 것은 우의정과 좌의정을 사돈으로 둔 수양의 기획이었다.
이러한 수양의 처신은, 국혼을 자신이 주도하여 외부로는 단종의 보호자라는 정치적 상징성을 내세우고, 한편으로는 훗날 단종의 지지기반이 될 수도 있는 외척세력의 출현을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수양의 노력이 무색하게 단종의 국혼 이후에도 세간에는 이런저런 유언비어들이 계속 떠돌고 있었다.
◆ 살육은 끝나지 않았다
쿠데타로 빼앗은 정권을 유지하는 데는 많은 무리수가 필요했다. 태종 이방원은 정도전(1342~1398)을 주살하고 그 아들 정진(1361~1427)을 전라수군으로 보냈다.
그 뒤 태종의 결정으로 복권되어 1416년에 직첩을 받고 1417년에 판안동대도호부사에 임명되었다. 그후 정진은 1419년 충청도 도관찰사까지 역임했다.
태종은 정도전과 가는 길이 달랐을 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수양은 달랐다. 명분 없는 정권을 정치보복으로 유지하려 했다. 안평대군의 아들 이우직(1439~1454)이 강화도 교동에서 살아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1454년 8월 15일, 추석날 태조의 건원릉과 문종의 현릉에서 추석제를 지낸 후 환궁하다가 수양은 반대파의 가족들을 처형시킬 것을 명령했다.
단종의 명을 빙자했지만 "대신의 의논도 이와 같았다"라는 기록처럼 수양이 결정한 것이었다. 이날 사형당한 인물은 안평대군의 아들 이우직 등 39명에 달했다.
◆ 숙부의 충성, 주나라 주공과 같다
수양의 천하가 열리자 소년 임금 단종은 어떻게 해서든 보위만큼은 지키기로 결심했다. 단종은 표면적으로는 숙부인 수양에게 깍듯이 대하며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행보를 이어가며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 속에 하루하루를 살며 어느덧 1년이란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경복궁 자미당 터 (자경전 서쪽 )
1454년 11월 25일, 단종은 세종이 머물렀던 경복궁 자미당 난간에 서서 "할바마마께서 살아 계셨다면 자신에 대한 사랑이 어찌 적겠는가?" 라며 그동안 애써 참아왔던 눈물을 터뜨리자 단종을 따르던 시종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
한편 백성들 사이에서는 수양이 왕위를 노린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1455년 1월 14일, 단종은 수양을 옹호하며 세간에 떠도는 풍문들, 예컨대 숙부가 조만간 군사를 일으켜 찬탈을 할 것이라는 소문들은 헛소문이라고 일축하는 교지를 내렸다.
동시에 이러한 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은 자신과 숙부의 사이를 이간질 시키려는 간교한 무리들이며 이는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일이라고 성토했다.
단종은 숙부야말로 주공 단과 같은 충신이니 두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 또다시 숙부를 음해하는 말을 퍼뜨리는 자가 있거든 일벌백계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주공은 주나라 문왕의 동생이자 성왕(재위 기원전 1042~기원전 1020)의 숙부로, 어린 성왕이 즉위하자 섭정을 맡아 보필했고 조카가 장성하자 스스로 권력을 내놓고 물러난 인물이다.
단종이 수양을 주공에 비유하며 칭송한 것은, 수양대군에게 왕위까지는 탐하지 말라는 정치적 압박이자, 살려달라는 애원이기도 했다.
◆ 주공이 되는 길 대신 당 태종의 길로
주나라 건국 당시 인간의 삶에 윤리를 찾기 어려웠던 사회환경 속에서 유학의 핵심인 도덕에 대해 강조하고 실천한 주공 단/ ‘정관의 치’를 이룬 성군으로 평가되는 당 태종 이세민
하지만 수양은 주공 단이 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수양이 선망의 눈길로 바라본 것은 당 태종(재위 626~649) 이었다. 당 태종의 경우 형제를 죽이고 부왕을 몰아내 권좌를 차지한 전형적인 찬탈 군주였다.
이는 결국 수양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단종을 밀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만 수양은 조카의 보위를 강탈한 찬탈자가 아닌 조카로부터 선위를 받는 모양새를 원했다.
하지만 조카 단종은 예상 밖으로 수양의 행보에 제동을 거니 여간 껄끄러운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수양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 이복동생 계양군(1427~1464)이 해결책을 내놓았으니 다름 아닌 단종의 측근들을 압박해 단종 스스로 왕위를 포기하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 단종의 측근들을 옥죄다
첫 대상은 금성대군(1426~1457) 이었다. 세종이 문종과 온천행을 갈 때면 단종은 금성대군의 집에 맡겨지곤 했다. 이 때문에 단종은 숙부들 가운데 금성대군이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종친이었다.
세종의 가족과 후궁 및 자녀들
계양군은 금성대군이 화의군(1425~1489)에게 면포를 선물하는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고 수양에게 알렸다. 1455년(단종 3) 2월, 금성대군에 대한 공세가 본격화되었다.
수양과 우의정 한확(1400~1456) 등이 단종에게 금성대군의 고신(告身·직책)을 빼앗으라고 요청한 것이다. 금성대군 집에서 화의군과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으며, 무사들을 모아 활을 쏘며 연회를 베풀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수양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었지만 힘없는 단종으로서는 대신들의 요구를 수락하며 금성대군의 고신을 거두고 화의군을 유배에 처하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사건은 여기서 일단락되지 않았다. 1455년 5월, 수양은 다시금 대신들을 움직여 금성대군에 대해 재차 탄핵을 가했다. 이번에는 탄핵 대상이 확대되었다.
금성대군이 혜빈 양씨(?~1455)와 결탁했으며 문종의 부마 정종(1437~1461)에게 금대를 선물해 은밀한 교감을 나누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수양은 단종을 압박해 가고 있었다.
1455년 6월 11일, 수양은 대신들과 승지들을 불러 모아 금성대군 일파가 역모를 꾀하고 있었다며 이를 가벼이 넘길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놨다. 이에 대소신료들은 금성대군 일파를 역률로 처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측근들을 살리기 위한 최후 선택 '선위'
결국 금성대군은 혜빈 양씨 등과 결탁해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유배형에 처해져 삭녕(경기도 연천·강원도 철원)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혜빈 양씨는 청풍으로 영양위 정종도 영월로 유배길에 올라야 했다.
단종은 이런 조치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자신을 도왔다는 이유로 유배를 가고 죽어가는 것이었다.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오른 세조의 영정. 합천해인사 소장
그렇다면 단종으로서는 숙부가 원하는 대로 옥새(玉璽)를 넘겨주고 그 대가로 자신과 주변의 소중한 이들의 신변을 보장받는 길뿐이었다.
금성대군 등이 귀양 간 그날 단종은 수양에게 왕위를 넘겨주겠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38세의 수양은 그날로 근정전에서 즉위해 조선 제7대왕 세조가 되었고, 정치적 숙원을 이뤘다.
쿠데타의 궁극적 목표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라면, 계유정변은 시작부터 끝까지 20개월이 걸린 길고 긴 쿠데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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