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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도(牛耳島)는 전남 신안군 도초면의 부속 섬으로 섬의 형태가 소의 귀를 닮아 소구섬, 소구 등으로도 불린다. 출처 : 서울STV뉴스(http://www.stvnews.kr)

관리자 2025-06-23 15:34:19


전남 신안군 우이도 전경





문순득의 고향 '섬 속의 사막' 우이도 풍성사구/ 한국섬진흥원



우이도는 한반도 서남해 바닷길의 요충지로, 이곳에는 바람에 실린 모래가 쌓이면서 형성된 동양 최대 규모였던 풍성사구(風成沙丘)가 있다. 

조선 후기에는 소흑산도로 불리며, 대흑산도와 같은 권역의 섬으로 인식되어 왔다. 우이도 주민들은 흑산도 주변에서 잡은 물고기를 육지에 파는 일을 하면서 살아 왔다.

1801년 12월,  25살이던 홍어장수 문순득(1777~1847)은 우이도에서 작은 아버지 문호겸 등 마을 사람 6명은 함께 배를 타고 홍어를 사기 위해 대흑산도 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태사도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듬해 1월 18일 돌아오는 길에 대흑산도와 태사도 중간에 있는 변도(‘곡갈’ 암초) 부근에서 갑자기 거센 풍랑을 만나 망망대해로 한없이 떠밀려가게 된다.

◆ 유구국에서 9개월 

동남쪽에 큰 산이 보였는데 제주도였다. 뻔히 바라보면서도 다가갈 수가 없었다. 표류 후 11일 만인 1월 29일 유구국(오키나와)의 대도(가고시마현 아마미오섬)에 표착하였다.





유구국은 1879년 메이지 시대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어 사라졌지만 당시 유구국은 동아시아 바다를 누비면서 해상무역을 주도하던 독립 왕국이었다.

문순득 일행은 배로 50여 리를 가서 양관촌(요로 섬)에서 움막을 치고 48일 기거하다가 다시 배를 타고 이동하여 4월 4일, 유구국의 수도 나하(那覇)로 이동하여 머물렀다.

그는 일행과 함께 매일 1인당 쌀 한 되 다섯 홉, 채소 여러 그릇, 하루 걸러 돼지고기를 지급받았다. 또 여름옷을 내려주고 몸이 아프면 의료 서비스도 제공받을 수 있었다.

유구인은 정직하고 심성이 착한 사람들이었다. 문순득 일행을 집으로 초대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스스럼없이 보여주기도 했다. 

문순득은 유구국에 머무르는 동안 현지 토속어를 익히고 그들의 생활을 꼼꼼하게 들여다보았다. 유구인은 어른들을 만나도 일어나지 않고 끓어 앉아 합장하고 부복하며, 앉을 때는 반드시 꿇어앉는다. 

유구인은 남녀 구분 없이 한자리에서 차 마시며 담배를 권했다. 담뱃대, 담배통은 늘 몸에 지니고 가래침 뱉는 타구도 휴대했다. 



유구국의 전통 의상



남자는 코밑수염을 기르고 어깨에 문신을 새겼다. 바지를 따로 입지 않고 긴 저고리가 발까지 내려간 차림에 신은 짚신이고 갓 대신에 모자를 썼다.

남자는 말 타고 여자는 대나무 가마를 탔다. 집은 네모 반듯했고 벽과 바닥을 판자로 엮어 온돌은 없었다. 장례식은 염이나 상여는 조선과 비슷했지만 여성이 앞장서는 풍습이 달랐고 무덤은 족장(族葬)이다.

9개월 동안을 유구국에서 생활한 문순득 일행은 현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조선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알 수 있었다.

청나라로 가는 유구국의 조공선을 타고 청나라에 간 다음 다시 조선으로 가는 것이었다.  1802년 10월, 그들은 유구국 나하에서 청나라로 가는 조공선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문순득을 태운 조공선은 또 큰 풍랑을 만나 10여 일 밀려다니다 11월 1일, 여송(필리핀)국 루손섬에 닿았다. 당시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조선인에게는 매우 낯선 곳이었다.

?여송국에서 표류인 운송을 책임진 유구국 사람들과 표류인인 푸젠성(복건성)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 문호겸 등 4명은 복건성 샤면(하문)과 푸저우(복주)를 거쳐 베이징에서 조선 동지사 일행을 만나 1804년 3월 문순득보다 9개월 먼저 귀국했다.

◆ 여송국 루손섬에서 9개월 

일행과 헤어진 문순득이 주로 체류한 곳은 필리핀 북부의 중심도시 비간(Vigan)이다. 비간은 중국계 상인, 스페인 통치자, 필리핀 원주민이 함께 어울려 사는, 말 그대로 문화의 용광로였다.

비간은 마닐라에서 자동차로 7시간이 걸린다.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스페인 식민지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문순득이 체류했던 도시 비간의 풍경



비간은 지금도 ‘스페인풍 거리’로 유명한데, 이 시대에 이미 유럽식 건축, 중국식 점포, 원주민의 복식이 공존했다. 조선의 유교적 사회에서 자란 문순득에게 이 풍경은 그야말로 이문화 충격이었다. 

여송국은 유구국에서처럼 따로 지낼 곳을 마련해 주고 먹을 것도 내준다거나 하는 건 기대할 수 없었다. 문순득은 도자기를 구워 서양으로 수출하는 청나라 사람들 마을에 의탁생활했다. 

생소한 나라 여송에서도 언어감각이 뛰어난 문순득은 토속어(일로카노어)를 익혀 현지인들과 소통했고, 비간 부르고스(Burgos) 광장에 있는 비간 성바오로 대성당을 구경하기도 했다. 

유구국에서 그랬듯 문순득은 여송국에서도 이방인들의 삶을 관찰했다. 





필리핀 전통가옥 '바하이 쿠보' 모형. 홍어장수 문순득이 여송국에서 생활한 공간이다. 



여송의 집은 네모지고 반듯하다. 주춧돌은 없고 땅을 파서 기둥을 세우고 높이 2~3장 위에 층집을 만들어서 사다리를 두고 오르내린다. 벽과 바닥은 모두 나무판자로 되어 있다.

부엌은 화재가 빈번해 불을 경계하여 수십 보 된 곳에 따로 두고 옥상에서 구름다리로 서로 이었다. 식수가 귀하여 빗물을 받아 마셨다. 

밥 짓는 것은 남자가 하고 밥 먹을 때는 가운데 밥 한 그릇, 반찬 한 그릇을 놓고 남녀가 둘러앉아 손으로 먹는다. 귀인은 시저(숟가락과 젓가락)를 쓰고 일간삼지(一幹三枝, 포크)로 꿰서 먹는다.

여송국 사람들은 붓이 아닌 펜으로 글을 썼다. 인종이 다양하고 혼혈도 많아 보였다. 춤은 남녀가 마주 서서 손을 늘어뜨리고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인다. 다박귀(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많은 점도 반가웠다. 

이곳 사람들은 끈을 꼬는 법은 몰라도 연날리기를 즐긴다. 면사, 포사를 사다가 끈을 꼬아팔아서 담뱃값과 술값을 벌었다. 골목들마다 닭싸움놀이가 유행이었는데 '만속'이라 했다. 조선에서도 유행하던 놀이이니 친근함이 있었다. 





비간의 성 바오르 성당 / 마카오의 성 바오르 성당



여송국에서 몇 개월을 지내면서 문순득 일행은 소주상인들의 쌀 무역을 돕는 등 다양한 경제활동을 통해 일정한 여비를 만들었다. 

문순득이 여송국 측 높은 사람을 만나 순풍이 오면 송환하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나 무역선이 도착했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나서야 출항이 결정됐다.

◆ 막가외에서 3개월 

문순득이 뱃삯으로 은전 12냥을 내고 승선하여 11일 만인 1803년 9월 9일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광동 오문이었다. 흔히 마카오라고 부르는 곳이다.

당시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개항장으로 개발하여 여러 나라의 다양한 선박들이 모여들었던 국제항이었다. 

이곳에는 필리핀 사람들과 서양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땅은 좁은데 반해 사람은 많아 집 위에다 집을 올려 지어서 살고 있는 모습이 매우 특이해 보였다. 

마카오에는 관청이 하나 있는데 주로 변방을 살피고 손님을 접대하며 상인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하고 있다.





1784년에 건축된 마카오 세나도 광장에 있는 '민정총서'



문순득이 마카오에 도착해서 포르투칼의 관원에게 인계되어 그곳의 관청에서 심문을 받았고 성대하게 대접해 주었다고 한 곳은 그 당시에 존재했던 '민정총서'였다.

석 달가량 마카오에 체류하면서 관청으로부터 조사를 받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청나라 관리가 조선인 표류객임을 말해주었다. 

그해 12월 마카오를 출발해 중국 내에서도 주로 배를 타고 이동했고, 때로는 걷기도 하고, 때로는 관에서 호송하는 가마를 이용해 남경에 도착했다.

또다시 배와 수레를 이용해 이동을 계속하였다. 도중에 여러 유적과 성곽들을 구경한 후 산동계를 거쳐 드디어 마카오를 출발한 지 다섯 달 만에 북경황성에 도착 후 고려관에 머물렀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가가 나자, 수레를 타고 조선 연행사와 함께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향할 수 있었고, 이듬해인 1805년 1월에야 고향인 우이도에 발을 디뎠다.




유구국 9개월, 필리핀 9개월, 마카오 3개월, 청나라에서 1년을 체류했다. 1805년 1월 8일 우이도로 돌아오기까지 약 3년 2개월이 소요되었다. 죽은 줄 만 알았던 문순득이 살아오자, 우이도 사람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 정약전?정약용 형제들과 교류

흥미로운 것은 문순득이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다산의 형제들과 직간접적으로 교우했다는 점이다. 

1801년(순조 1), 조선에서는 최초의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 사건이 일어났다. 신유박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노론 강경 세력들이 남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3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고, 정약전?약용 형제도 기약 없는 유배길에 올랐다. 이때 전라도까지 함께 내려간 형제는 나주에서 길이 갈려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갔다.

문순득은 당시 유배 중인 손암 정약전(1791~1807)을 만나 그의 뛰어난 기억력과 관찰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표류담을 털어놓았다.





문순득의 표류 일기 '표해시말'



정약전은 문순득의 경험을 듣고, 그에게 천초(天初)라는 별호를 지어주었다. 세상의 다양한 문물을 처음으로 경험하고 돌아왔다는 뜻이다. 정약전은 이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표해시말」이라는 책으로 남겼다. 

표해시말 저술을 끝낸 정약전은 강진에 있는 동생 정약용(1762~1836)에게 문순득의 표류담에 대해 들려주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편지를 문순득에게 들려서 강진으로 보냈다. 

정약용은 문순득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마카오의 번화한 시장에서 오가던 금전과 은전 동전 얘기에 정약용은 귀를 기울였다. 문순득이 경험한 마카오 시장의 경험은 정약용의 「경세유표」로 이어졌다.

"... 지금의 동전 한 닢 무게로써 은전 한 닢을 주조하여 동전 50을 당하고, 또 은전 한 닢 무게로써 금전 한 닢을 지어서 은전 50을 당하게 하되, 대·중·소 3층이 있도록 하면, 3종류의 금속이 총 9종류의 돈으로 되는데 참으로 9부 환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1816년 우이도에서 유배 생활 중 숨을 거둔 형 정약전의 장례를 문씨(문순득 추정)들이 치러 준 고마움에 강진에서 유배 중이던 동생 다산 정약용은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정약전은 유배생활 16년 만인 1816년(순조 16) 유배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우이도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 중이라 장례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이때 문순득이 정약전의 장례를 극진히 치러주었다.

◆ 문순득 덕분에 9년 만에 고국으로 송환되다?? 

1801년 8월, 제주도에 국적 불명의 외국인 5명이 표류해 왔다. 본래 동아시아 국가들 간에는 외국인이 표류해 오면 식량과 의복을 주고, 배를 수리해 주거나 본국으로 가는 배편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관례가 있었다. 





순조실록(순조9년 6월 26일)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그들이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막가외(莫可外)’라는 말을 거듭하며 바다만 가리켰다. 조정은 골머리를 앓았다. 이런 상황에서 9년이나 흐르면서 2명이 사망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조선과 청 양국 사이를 오가며 고초를 겪을 때, 1809년 문순득이 제주를 찾아가 여송국에서 배운 '일로카노어'로 말을 걸어 보니 필리핀 사람이었다.

그들이 외친 '막가외'는 자신들의 고향 필리핀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카오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들은 문순득 덕분에 고국으로 송환될 수 있었다.?? 문순득은 이 공을 인정받아 종2품 가선대부 공명첩을 하사 받았다.





문순득은 홍어를 내다 파는 민초였지만 바다 삶을 통해 지혜를 터득했고 표류하는 과정 중에도 좌절하지 않고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낯선 사람들과 사귀면서 어려움을 극복한 해양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