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0년 정중부(1106~1179)가 이의방(?~1174) 등과 함께 무신정변을 일으켜서 정권을 장악했다. 이의방부터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1149~1219) 최우(1169~1249) 최항(1209~1257) 최의(1230~1258) 김준(?~1268) 임연(1215~1270) 임유무(1248~1270)로 이어졌다.
1270년 임유무가 원종(24대 왕)의 밀명으로 살해될 때까지 100년 동안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무신정권의 종말은 고려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지만 동시에 몽골 간섭기라는 또 다른 도전의 시작이기도 했다.
1206년 칭기즈칸(1162~1227)이 몽골족을 통합하여 몽골국(蒙古國)을 건국했다.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동유럽을 유린하며 세계사의 판도를 크게 바꾼 대제국이자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력을 지녔던 국가이다.
1237년과 1259년 몽골 제국의 영토 현황
1225년 칭기즈칸의 칙서를 가지고 고려를 방문한 몽골국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 근교에서 산적들에 의해 살해당하자 몽골국은 고려와 국교를 단절했다. 고려는 몽골이 침략의 빌미를 만들기 위한 자작극으로 판단했다.
1231념부터 1259년까지 30여년 동안 9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는 끝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당시 고려 인구는 300~40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20만 명이 포로로 끌려갔고 사망자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고려는 생존 전략으로써 강화도로 천도해 30여 년간 항전했으나 결국 1259년 항복하였다. 이후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어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간섭을 받게 되었다.
◆ 원나라의 명을 따르라
몽고는 1271년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나라 이름을 원(元)으로 바꾸었는데, 원의 지배 방식은 고려 왕실을 통한 간접 통치였다. 고려 국가의 존립은 인정해 주되 문제가 생기면 사신을 보내 문책하고 왕을 갈아 치웠다.
원의 간접 통치가 잘 드러난 정책이 바로 원나라 공주와 고려 왕의 혼인이다. 충렬왕이 원 세조의 딸을 왕비로 맞은 이래, 역대 고려 왕은 원 황실의 공주를 왕비로 삼고, 그 아들은 원나라에 살다가 고려에 돌아와 왕위에 오르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초상화
고려의 역대 왕들 중에서 충렬왕(재위 1274~1308), 충선왕(재위 1298~1313), 충숙왕(재위 1313~1330, 복위 1332~1339), 충혜왕(재위 1330~1332, 복위 1339~1344), 충목왕(1344~1348), 충정왕(재위 1349~1351)은 시호 앞에 '원나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라는 뜻으로 '충(忠)'자를 붙여야만 했다.
또한 고려 고종(충헌왕·재위 1213~1259)과 원종(충경왕·재위 1259~1274)또한 이 '충(忠)자돌림'의 시호를 원나라로부터 받았었다.
원의 지배 하에서 민중의 생활은 피폐해져만 갔다. 원의 갖가지 요구는 그대로 민중에게 떠넘겨젔고, 그런 가운데 친원 세력과 권문세족은 권력을 이용한 불법적인 약탈과 강점으로 토지를 넓히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 공민왕의 반원자주화 개혁 정책
14세기 후반 국제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그동안 강력한 제국으로 군림했던 원나라가 서서히 쇠퇴했고, 새로이 중국 한족이 중심이 된 명(明)나라가 부상하고 있었다.
1351년 즉위한 공민왕(재위 1351~1374)은 변화하는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반원 자주화 개혁 정책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우선 공민왕은 고려 사회에 파고들었던 몽고 풍습의 혁파를 단행했다.
당시 대표적인 몽고 풍습으로는 변발, 호복 등이 있었다. 1356년에는 몽골 연호와 관제를 폐지하고, 원의 내정 간섭 기구인 정동행중서성 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도 폐지한다.
공민왕이 반원자주정책을 실시하며 몽골풍을 금지하자 기황후의 오라비 기철이 반발하자 공민왕은 기철 일파를 숙청했다. 기황후는 오라비가 죽자 원나라 황제에게 고려를 침공해 달라고 매달렸다.
아울러 공민왕은 원나라의 위세에 편승해 고려 조정을 좌지우지했던 기철(?~1356) 일당을 숙청하게 된다. 또한 공민왕은 최영(1316~1388)에게 군사를 주어 기철일파의 근거지였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원이 지배하던 철령 이북의 땅을 되찾았다.
공민왕은 14년 동안 끊임없이 반원정책을 펴고 내정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안팎으로 거센 반발과 도전을 받아야 했다.
어느 날 공민왕은 명덕태후(1298~1380)를 만나 꿈 이야기를 했다. “간밤에 이상한 꿈을 꿨습니다.” “무슨 꿈이신가요?” “어떤 자가 칼로 저를 찌르려고 하는데, 한 승려가 구해주는 꿈이었습니다.” “부처님의 공덕으로 어려움에서 벗어난다는 꿈이군요. 나쁜 꿈이 아닙니다.” ?
그때 김명원이 편조대사(신돈)를 공민왕에게 알현시키는데 편조를 본 공민왕은 깜짝 놀랐다. 꿈에서 본 승려와 매우 닮았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편조와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평소 그가 뜻하던 것과 모두 맞았다. 공민왕은 재위 14년(1365) 5월 편조를 사부(師傅)로 삼고 국정을 자문했는데, 그가 바로 신돈(1323~1371)이다.
◆ “성인(聖人)이 나오셨다!”
신돈을 사부로 삼은 지 7개월 후인 재위 14년(1365) 12월, 그에게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영도첨의사사사(현 국무총리), 판중방감찰사사(현 감사원장), 취산부원군, 제조승록사사(불교를 총섭하는 수장), 판서운관사(현 기상청장)' 등 고위 관직을 겸임시켰다.
옥천사지, 지금은 옥천사의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 있는 곳이며, 고려 말의 승려이자 개혁적인 정치가인 신돈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신돈의 어머니는 옥천사의 노비였다고 한다.
요컨대 신돈이 부여받은 직위는 정치·군사·법률·종교를 총괄하는 것이었다. 품계는 정1품이지만 사실상 왕권을 부여받은 것이다.
신돈은 정식 관명을 가진 고려의 관리로서, 그가 정권을 잡은 6년 동안 우리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최대의 개혁 정책을 펼쳤다. 그가 조정에 나올 때 관복을 입고 머리를 길렀으므로 사람들은 비승비속(非僧非俗)이라 불렀다.
1365년(공민왕 14년), 신돈은 집권하자 본격적으로 대규모 개각을 단행한다.? 첫 번째로 개혁에 큰 걸림돌이 되는 중앙 무장세력을 해체했다. 당시 최고의 무장인 최영(1316~1388)을 경주 지방관으로 좌천시키고 훈작도 삭탈하고 군사 지휘권을 회수한다. 그 당시에는 최영 역시도 권문세족의 일원이었고 최영 측근의 무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고려 말의 가장 큰 사회 모순은 불평등한 토지 소유 관계에 있었다. 권문세족이라는 소수의 기득권층이 경제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신돈의 두 번째 개혁으로 1366년(공민왕 15년),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여 문제가 심각하던 토지제도와 노비제도를 혁신한다.
전민변정도감은 원간섭기에도 여러 번 시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었다. 수도에선 15일, 지방에선 40일 이내에 남의 것을 빼앗아 만든 노비와 토지를 돌려주라는 경고였다.
신돈의 위세에 눌린 권세가들은 빼앗은 토지와 노비로 전락시킨 백성들의 신분을 환원시켰다. 수많은 백성이 전민변정도감으로 몰려가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때마다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자 백성들은 한목소리로 신돈을 칭송했다. “성인(聖人)이 나오셨다!”
고려 성균관 대성전 / 일제강점기 개성 고려성균관 전경.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특히 신돈이 당시 승려신분이었으나 1367년(공민왕 16년), 세 번째 개혁 조치로 신돈은 몽골 침략 시기에 불탄 성균관을 중건했다. 이후 성균관 총관리자인 대사성에 이색을 임명하여 다음 세대를 이끌 지도자로서 신진 유학자들을 키워나갔다.
◆ 좌주와 문생, 사조직 혁파
과거 제도를 개선하는 정책도 추진했다. 고려시대에 과거를 주관한 시험관을 지공거(知貢擧)라고 불렀다. ‘공거’는 과거의 다른 이름이고, ‘지知)’는 주관한다는 뜻이므로 지공거란 시험의 출제부터 채점·선발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는 사람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맡았으나 1083년(문종 37년)부터 두 사람이 정·부가 되어 각각 지공거, 동(同)지공거라고 했다. 과거 급제는 전적으로 지공거의 판단에 따라 결정되었으므로 급제자들은 자기를 뽑아준 지공거와 동지공거를 좌주(座主)라고 부르고, 좌주는 급제자들을 문생(門生)이라고 불렀다.
좌주와 문생은 서로 유대관계를 맺게 되는데, 유대는 때로 정치적 관계로 발전했다. 공민왕은 과거 출신 문신들에 대해 “문생이니 좌주니 하면서 당을 만들고 사사로운 정에 이끌린다”라며 비난했다.
고려가 멸망하기 3년 전인 창왕 1년(1389) 발급한 과거 합격증이다.'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 국새가 찍힌 현존 유일 고려 공문서로 알려진 '최광지 홍패(紅牌)'가 2020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 됐다.
과감한 개혁정치를 추진하고 있던 공민왕에게 과거급제자들은 좌주-문생 관계를 통해 사조직을 만들고 개혁에 저항하는 기득권 세력으로 비쳤던 것이다. 이에 과거제도를 고쳐 좌주-문생 관계가 더 이상 생기지 못하도록 했다.
친시(親試)라고 해서, 지공거와 동지공거가 채점까지 끝내고 33명을 선발하면 왕이 직접 시험을 쳐서 석차를 매기는 방식이었다. 급제자가 지공거의 문생이 아니라 국왕의 문생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킴으로써 사적인 좌주-문생 관계를 국왕과의 공적 관계로 전환하고자 한 것이다.
또 과거제의 특혜를 없애고 오직 정식 과거를 통해서만 벼슬길에 나오게 하였다. 과거제 개정은 기득권 세력의 팔다리를 자른 조치였다. 관리의 승진에는 순자법(循資法)이 단행되었다. 이는 당시 무장세력들이 군공으로 급속히 승진하여 발생했던 관료체계상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국정 정상화를 이루기 위한 조치로서 의미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