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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콘텐츠?] 한남동에 울러 퍼진 총성...신군부의 등장을 알리다

괸리자 2024-03-14 14:25:02
합동수사본부 백동림 수사국장이 10월 29일부터 11월 1일까지 鄭 총장을 10.26 사건의 참고인으로 조사했다. 

그리고 全 합수부장은 11월 6일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군이나 외부의 개입은 없었다”라고 발표했다. 鄭 총장의 10·26 관련 혐의를 부인한 것이다.




보안사령부(기무사령부)

하지만 보안사령부가 1982년 5월 석·박사 20명으로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편찬한 「제5공화국 전(前)사」에 따르면 全 합수부장은 11월 초에 鄭 총장의 제거를 결심했다.

全 합수부장은 허화평 대령, 허삼수 대령, 수사국장 이학봉 중령, 수도경비사령부 30 단장 장세동 대령, 33 단장 김진영 대령과 鄭 총장 문제를 논의했다.

◆ 하나회 포섭 장소, '연희동 전두환 자택'

全 합수부장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집은 현대사의 중요한 역사적 공간이다. 쿠데타를 치밀하게 준비하는 과정에서 연희동 집을 활용했다.

12월 6일 全 합수부장은 백운택 71 훈련단장과 장기오 5 공수여단장을 각각 자신의 집으로 불러 쿠데타 동참을 약속받았다.




전두환의 연희동 주택



이어 9일에는 최세창 3 공수여단장, 박준병 20 사단장도 연희동으로 초대해 의사를 물었다. 이어 박희도 1 공수여단장도 全 합수부장을 만나 깨알 지시를 받았다.

황영시 1 군단장은 노태우가 접촉했고,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와 차규헌 수도군단장은 全 합수부장이 12일 당일 연락을 취했다.

◆ "12월 12일 생일집 잔치에 오라”

全 합수부장은 자신의 집 등에서 만난 장성 9명에게 “12월 12일 오후 6시 30분 경복궁 안 수경사 30 경비단장실로 오라”고 초청했다. 

12일 청와대 경호 임무를 위해 경복궁 북서쪽 옛 태원전 권역에 주둔하던 수경사 30  경비단 단장실에 황영시 1 군단장 등 장성들이 속속 도착했다.

장성 9명과 30 경비단장 장세동 대령, 33 경비단장 김진영 대령 등 영관급의 하나회 세력이 집결하여 반란군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이 모임은 그들 사이에서 '생일집 잔치'라는 은어로 불렸다. 군사 독재 정권의 등장을 '생일'에 빗대고 12.12 쿠데타 상황을 '잔치'에 비유한 것이다.

全 합수부장은 보이지 않았다. 행방을 묻는 이들에게, 장세동 대령은 "全 합수부장은 鄭 총장 수사문제에 대한 보고와 승인을 얻으려 오후 6시 40분경 崔 대통령에게 갔으며"

"재가가 날 것으로 기대하고 저녁 7시를 기해서 鄭 총장을 연행할 계획으로 우경윤과 허삼수 대령이 총장 공관으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全 합수부장은 12일 18시 30분경 鄭 총장 강제 연행이 추진되는 시점에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김진기 육본 헌병감을 연희동에 있는 한정식 요정에 묶어 놓았다.

全 합수부장은 우국일 보안사 참모장을 대신 보내 접대케 하였으며, 수경사 헌병단장 조홍 대령이 참석하여 상황 파악을 주도하였다.

◆ 허삼수, 정보처장으로 위장하다

앞서 全 합수부장은 12일 18시 전, 인사처장 허삼수 대령, 육군범죄수사단장 우경윤 대령에게 鄭 총장의 강제 연행을 지시했다.

全 합수부장의 지시를 받은 두 대령은 합수본부에 배속된 33 헌병대 1개 소대와 10여 명의 보안사 수사관, 그리고 3명의 헌병장교들을 데리고 한남동의 鄭 총장 공관으로 출발했다.

헌병장교는 육군본부 헌병감실 기획과장 성환옥 대령, 33 헌병대장 최석립 중령, 육군참모총장 공관 경비를 책임진 헌병대 이종민 중령이었다.

수경사 33 헌병대는 원래 대통령 경호실에 배속되어 있었으나 10·26 뒤 궁정동 시해현장을 조사할 때부터 합동수사본부장이 관할했다. 




12.12 당시의 한남동 참모총장 공관 해병대 경비대


그러나 총장공관 외곽의 경계병력과는 사전 제휴가 없었다. 총장공관 외곽의 경계병력은 해병대였다.

허 대령은 출발하기 직전 총장공관에 전화를 걸어 부관 이재천 소령과 통화했다. 허 대령은 총장에게 보고사항이 있어 찾아가겠다고 했다.

이때 허 대령은 자신을 보안사 정보처장이라고 소개했었다.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은 권정달 대령이었다. 

보안사 인사처장인 허 대령으로서는 참모총장을 면담하는 데 정보처장이라고 위장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 전두환 500만 원, 정승화 300만 원

승용차 두 대에 허, 우 대령과 헌병장교들이 타고 헌병 1개 소대는 마이크로버스에 타고 뒤따랐다. 

이들이 공관입구에 도착한 것은 18시 50분이었다. 부관 이재천 소령이 "보안사 처장이 보고하러 왔다"며 鄭 총장에게 알렸다.

허 대령이 "총장님께서 김재규로부터 돈을 많이 받으셨더군요. 그래서 총장님의 진술을 좀 받아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협조하여 주셔야겠습니다"하고 말했다. 

추석을 앞두고 김재규 전 중정부장으로부터 全 합수부장은 500만 원을, 鄭 총장은 300만 원을 받았다.

鄭 총장이 김재규에게 받은 돈은 당시 중정부장이 각급 군 지휘관에게 의례적으로 준 떡값으로 처음부터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이다. 

◆ "대통령 재가를 받았다" 

鄭 총장은 "무혐의로 끝난 사안 아니냐"고 허 대령에게 말했다. 하지만 허 대령은 "진술을 녹음하게 저희 부대로 가주셔야겠다"고 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서명한 정승화 대장의 인사발령안



鄭 총장은 "이놈들, 누가 그 따위 지시를 하던가? 내가 계엄사령관인데 대통령 이외에 그런 지시를 할 사람이 없는데 대통령이 그런 지시를 해?" 하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허 대령은 "대통령 재가를 받았다"고 답했다. 거짓말이었다.

鄭 총장은 "만약 그렇다면 대통령이 직접 전화라도 있을 텐데 내가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그러한 조사에 응할 수 없어"하며 부관을 불러 말했다. 

"총리공관이나 장관에게 전화 대!"라고 지시했다. 부관 이 소령이 부관실로 황급히 들어오더니 전화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 소령이 부관실에서 전화를 거는 순간 합수부 김대균 소령, 한길성 소령과 박원철 상사 등이 이를 제지하기 위해 권총을 발사하여 부관 이 소령과 총장 경호대장 김인선 대위가 총상을 입었다.

◆ 12.12 군사반란의 서막

공관에서 총성이 울리자 2층에서 鄭 총장의 아들이 38 구경 권총을 가지고 내려오고 있었다. “인마, 쏘지 마! 네 아버지가 죽는다!” 응접실에서 鄭 총장을 인질로 잡고 있던 허 대령이 소리쳤다. 

이때 건물 밖에서 응접실을 주시하고 있던 보안사 박원철 상사가 M16 소총으로 유리창을 깨고 뛰어들어왔다. 

그리고 아들에게 총을 겨눴다. 아들은 2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뭘 꾸물대!” 鄭 총장에게 총을 겨눈 박 상사의 고함이 밤의 정적을 깼다.





대기시켜 놓았던 합수부 승용차에 강제로 태워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갔다. 총소리를  들은 공관 외곽을 지키는 해병대가 뒤늦게 출동했지만 이미 鄭 총장은 사라진 후였다.

全 합수부장의 鄭 총장 체포작전은 성공했다. 이제 남은 건 崔 대통령의 체포 허가를 받는 것뿐이었다.

全 합수부장은 계획대로 이날 저녁 수사국장 이학봉과 대통령 의전수석비서관 정동렬과 함께 삼청동 총리 공관으로 향했다. 

全 합수부장은 鄭 총장이 돈 수수한 것이 추가로 드러났기 때문에 연행·조사 재가를 요구했다.

崔 대통령은 "수사 과정에서의 단순 진술만으로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할 순 없다"며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먼저 상의해 볼 것"이라고 재가를 거부했다.

당시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공관에서 들린 총소리에 겁을 먹고 가족들과 도주한 상태였다. 全 합수부장은 결국 崔 대통령 재가 없이 鄭 총장을 전격 체포했다. 12.12 군사반란의 서막이다.

◆ 총장님을 구출하라!

연희동 만찬 시작 직후 술병을 따서 작은 잔으로 한 바퀴 돌리고 두 번째로 잔이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김진기 헌병감을 찾는 무선 연락이 왔다. 김 헌병감이 전화를 걸고 오더니 "총장공관에서 총성이 났답니다"고 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도 요정에서 바로 총장공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누가 받는데 "앰뷸런스! 앰뷸런스!"라고 소리치고는 끊는 것이었다.





장 사령관은 그 자리에서 바로 수경사 헌병단 신윤희 부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즉시 장갑차 한 대와 헌병 1개 소대를 끌고 가서 총장님을 구출하라"고 명령했다.

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발생하고 총장의 생사가 불분명하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각자 부대로 복귀하였다.

장 사령관이 수경사로 돌아오는 차에 동승한 조홍 헌병단장에게 물었다. "혹시 집히는 게 없나? 간첩이 들어온 것은 아닐 테고 혹시 진급에 불만을 가진 놈이 일을 저지른 것 아닌가"

복귀한 장 사령관은 全 합수부장이 반란을 일으킨 사실까지 듣고서는 극대노를 했다. 김기택 참모장이 30 경비단에 반란군 측 장군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 하나회에 포위된 최규하

全 합수부장이 崔 대통령의 재가를 기다리며 총리공관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 김진기 헌병감이 구정길 총리공관 경호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全 합수부장 체포를 명령했다.

그러나 이미 노태우 지시를 받은 청와대 상황실장 고명승 대령이 101 경비단의 경찰병력과 55 경비대대의 1개 소대 병력을 이끌고 총리공관으로 출동했다.

공관의 경비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대통령 경호대장 중령 구정길과 경호대원들의 무장을 해제시킨 후 그곳 막사에 억류하고 총리공관을 봉쇄하였다.





12.12의 현장 (총리공관)


그후 55 경비대대 2개 제대 병력 64명을 추가로 출동시켜 그 일대에 배치함으로써 총리 공관을 장악하였다.

◆ 오늘 밤은 여기가 최전방이야

崔 대통령에게 鄭 총장 체포 재가를 받지 못해 궁지에 몰린 全 합수부장은 30 경비단으로 복귀했다.

全 합수부장은 반란군 세력에게 대통령 재가 관련 진행 상황을 설명하고 유사시 부대 출동에 대한 약속과 다짐을 받았다.

노태우 9 사단장이 최세창 3 공수여단장과 장기오 5 공수여단장에게 소속부대를 장악할 것을 지시하자 각자 부대로 복귀했다.

박희도 1 공수여단장은 부여단장 이기룡 대령에게 부대 출동을 지시했다. 노태우 9 사단장은 참모장 구창회 대령에게 출동 준비를 명령했다.

1 군단장 황영시는 00시 30분에 이상규 2 기갑여단장에게 경복궁 중앙청으로 병력 출동을 지시하고, 01시 10분경에는 박희모 30 사단장에게 고려대학교로 출동할 것을 명령했다.

◆ 대통령 협박하는 군벌들

한편 황영시가 “우리 함께 대통령에게 갑시다”라며 바람을 잡았다. 

이에 전두환, 황영시, 유학성, 차규헌, 백운택, 박희도 등은 반란군 측 병력이 점거한 국무총리 공관을 다시 방문했다.

유학성이 "각하, 이런 시기에 군이 자칫 잘못하면 혼란이 가중되고 전쟁을 자초하게 됩니다"라고 했다. 사실상의 재가 협박이었다. 

하지만 崔 대통령은 "이런 문제는 계통을 통해서 하겠소"라며 거절했다. 

2차 재가 획득 시도가 실패하자 이들은 보안사 상황실로 이동해 각급 부대에 대한 도·감청을 통해 실시간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각 부대에 파견된 보안사 인력과 하나회 인맥을 통해 일선 부대 지휘관과 참모들을 회유 및 협박하여 전반적인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 역사의 흐름을 바꾼 9 공수여단 회군

박희도 1 여단장의 지시에 따라 이길룡 부여단장이 1 여단 각 대대에 병력 집결 명령을 하달해 1 공수 1대대 병력이 신월동 삼거리에 집결하였다. 

육군본부와 특전사령부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일단 여단으로 복귀하였다. 

당시 이 같은 1 여단의 움직임을 보고 받은 육본 수뇌부가 정식 작전명령으로 9 여단 병력을 출동할 것을 지시하였다.





12.12 군사반란에 동원된 탱크



윤홍기 9 여단장은 비하나회이기 때문에 당시 특전사령부와 육군본부가 신뢰할 수 있는 특전사 병력이었다.

특전사령부에 21시경 도착한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상황을 점검하고 이순길 부사령관을 1 여단으로 파견해 1 여단의 출동을 저지하고 여단에 배속된 차량을 9 여단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全 합수부장의 명령에 따라 30단을 떠나 1 여단에 도착한 박희도 1 여단장은 이순길 부사령관의 만류를 뒤로 하고 1 여단의 부대 출동을 지시했다.

23시 55분 1 여단 4개 대대가 여단을 출발했다. 한편 9 여단은 23시 30분에 정병주 특전사령관으로부터 출동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병력 이동을 위한 차량 확보가 지체되고 교통량 혼잡 상황 등을 고려하여 통행금지 이후 00시 05분에 1개 대대 병력을 우선 인솔하여 출발하였다. 

박희도의 1 여단과 윤홍기의 9 여단이 동시에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1 여단은 행주대교로 돌아 서울로 진입했고 9 여단은 경인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이 속도라면 9 여단이 먼저 서울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이에 全 합수부장은 육군 본부에 전화를 해 신사협정을 제안했다. 

9 여단이 서울에 진입하면 자신들도 병력을 다 동원하겠다며, 서울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싫다면 9 여단을 돌려보내라고 했다.

그리고 이를 수락할 시 본인도 1 여단의 복귀를 명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윤성민 참모차장은 全  합수부장의 신사협정을 수락하고 9 여단에 부대  복귀를 명령했다.

00시 20분에 육군본부로부터 부대 복귀 명령이 내려오자 9 공수여단은 부천 IC 부근에서 회군하였다. 

그러나 이 협정은 곧 깨졌다. 전두환은 9 여단의 회군에도 불구하고 1 여단의 서울 진입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