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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콘텐츠?] 박정희의 후견으로 성장한 정치군인 전두환과 하나회

편집인 2024-02-05 15:14:44
전두환은 대위 시절인 1959년 가을 결혼 직후 박정희를 처음 만났다. 박정희가 영등포 6관구 사령관으로 있을 때, 장인 이규동과 함께 사령관실을 찾아갔다.

박정희는 전두환이 마음에 들었다.  "자네 여기 와서 내 부관을 하게나" 그러나 전두환은 사양했다. “저는 부관 체질이 못됩니다 야전에서 뛰겠습니다!"

이렇게 인연을 맺은 박정희가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전두환은 그날 아침 8시경 육본에 들어가 상황 파악을 하는 등 정치군인의 면모를 드러냈다. 

5·16 군사정변 후 이틀이 지났지만 성공인지 실패인지, 윤곽이 오리무중이었다. 

전두환은 육사 생도와 졸업생을 동원하여 동대문에서 시청광장까지 박정희 쿠데타 지지를 내건 시가행진을 주도했다. 이는 박정희 반란군의 생명줄이 되었다.





1961년 7월, 육사 생도 ‘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성공시킨 공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처리 담당 비서관이 된 대위 전두환(뒷줄 오른쪽 첫 번째). 당시 중령 윤필용(앞줄 가운데)이 비서실장이었다.


이후 전두환은 박정희 초기부터 말기까지 박정희의 그늘 아래 탄탄한 출세 가도를 달렸다. 혁명 지휘부인 국가재건최고회의 민원비서관을 거쳐,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이 된다.

인사기록카드에 남아 있는 신원 보증인은 장인 이규동과 박종규 2명이다. 경호실장 박종규는 전두환의 생애에 걸친 후원자 역할을 했다. 

◆ 1963년  7·6 친위 쿠데타

하나회는 육군사관학교 11기 재학 때부터 용성 전두환, 관성 노태우, 여성 김복동, 혜성 최성택, 웅성 박병하로 구성된 친목 조직 '오성회(五星會)'가 시작이었다.

초기 오성회였던 박병하는 중간에 유급당해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이후 손영길, 권익현, 정호용이 입회해 '칠성회(七星會)'가 되었다.

칠성회는 1963년 3월 1일, 군내 비밀사조직 하나회가 결성되는 배경이 되었다. 그들은 최초의 정규 육사 4년제 과정 출신이라는 점에서 엘리트 의식이 강했다.

전두환과 하나회는 짧은 기간의 교육을 받은 선배들이 군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박정희와 함께 5.16 쿠데타 주역인 육사 8기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5.16 수뇌부' 장도영과 박정희 5.16 쿠데타 며칠 뒤 장도영(왼쪽)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박정희 부의장이 한 자리에 선 모습 ⓒ 정부기록사진집


5.16 쿠데타 이후 장도영과 박임항 등 2개의 쿠데타를 경험한 전두환과 하나회는 마침내 1963년 7월 6일, 동기 11명을 모아 김종필 등 육사 8기를 제거하기 위해 친위쿠데타를 도모했다.

7.6 친위쿠데타는 실패로 끝났고, 정승화 방첩대장에게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당시 박정희의 전속 부관이던 손영길(육사 11기)이 정승화 방첩대장의 보고에 앞서 박정희에게 "각하를 위해 충성하려고 친위쿠데타를 했다"며 선처를 청했다.

결국 손영길의 요청으로 박정희는 자신의 영남인맥 구축과 육사 8기 견제 등을 위해 이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 전두환, 손영길 날개를 꺾다

전두환은 처음부터 하나회의 리더는 아니었다. 초대 리더는 손영길이었다.

손영길은 박정희의 부관을 2차례 역임하며 4년 넘게 보좌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다. 때문에 육사 11기의 명백한 선두주자였다.

1967년 손 중령은 육군대학에 입학하면서 공수부대에 근무하던 전두환 중령을 30 대대장 후임으로 추천했다.

손영길이 거쳐온 보직을 전두환이 이어받고, 전두환이 거친 보직을 노태우가 이어받는 구조였다. 30 대대장에 부임한 전두환은 이때부터 하나회를 비밀 사조직으로 키웠다.





1967년 8월, 청와대 경비를 맡는 수경사 30대대장 이취임식 뒤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전두환 중령(왼쪽)과 전임 손영길 중령.


손영길은 전두환이 육사 8기 대상 쿠데타 사건 등 큰 위기가 있을 때마다 도움을 줬다. 하지만 손영길의 날개를 꺾은 건 다름 아닌 전두환이었다.

1972년 12월 말 손영길 대령이 준장 진급이 확실시되자 이후락 중정부장이 손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박 대통령의 허락을 받고 중앙정보부 2 국장으로 오라고 요청했다.

손영길은 이를 윤필용 수경사령관에게 보고했고, 윤필용은 자신이 데리고 있던 참모장을 중정에 보낼 것인지를 결정하기 전 박 대통령에게 보고해 승낙을 받기로 했다.

윤필용이 박 대통령에게 의중을 타진하자 "장차 참모총장을 해야 할 인물이니 정도를 걸어가도록 윤 장군이 잘 지도하라. 정보기관에 가서는 안 되니 계속 데리고 있으면서 잘 키워주라"라고 지시했다.

손영길이 수경사 참모장에 보직된 후, 그전까지 사이가 나쁘던 이후락과 윤필용의 관계가 좋아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박종규의 파워가 약해지고 이후락 쪽으로 힘이 쏠리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윤필용이 사석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전두환에게 "앞으로 더 잘해야겠어. 박 대통령이 손영길을 참모총장으로 키우라는 당부가 있었으니 분발해야겠어"라고 충고했다는 것이다.

1973년 1월 초, 손영길과 전두환의 경쟁심을 부추기는 또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윤필용은 10월 유신 공로자 2명을 추천하라는 정부의 연락을 받았다. 윤필용은 손영길과 전두환을 추천했다.

그런데 총무처 장관이 "1명만 2등 훈장을 주고, 1명은 3등 훈장을 주게 됐다. 누구에게 2등 훈장을 주겠냐" 고하자 윤필용은 "2등 훈장은 손영길에게"라고 했다. 전두환이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불문가지였다.

◆ 12.12 군사반란의 밑거름, 윤필용 사건

1972년 가을, 어느 술자리에서 윤필용이 중정부장 이후락에게 "각하의 후계자는 형님이십니다. 아무리 김춘추도 당나라에 갔다 와서 결국 신라의 왕이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발언하는 일이 일어났다,

얼마 뒤 박정희가 같이 골프를 치던 서울신문 사장 신범식에게 “항간에 내 후계자 소문이 돈다던데 자넨 누군지 아나"라고 추궁하는 일이 있었다.

신범식은 처음에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박종규 경호실장이 신 사장 머리에 총까지 겨누면서 이름을 대라고 협박하자 결국 신범식은 윤필용의 술자리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1973년 4월 육군 보통군법회의 법정에 나온수경사 윤필용 사령관(오른쪽)과 손영길 참모장(육사 11기). 두 사람 모두 박정희 대통령 측근이었다.


당시 군에서 가장 강력한 실력자이고 육사 8기생 중 선두주자이던 윤필용은 이 사건으로 인해 1973년 3월 8일 구속되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박종규 경호실장을 찾아가 ‘윤필용이 이후락과 가까워지고, 윤필용이 각하에게 불경 언동을 하게 된 것은 두 사람을 가깝게 만든 손영길에게 책임이 있다.

따라서 윤필용보다 더 나쁜 사람이 손영길이니 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윤필용 구속 다음 날 손영길은 최전방 15사단 부사단장에 보임돼 쿠데타 음모 사건에서 비켜서는 듯했으나 1주일 후 전격 해임되고 서울로 압송돼 서빙고에 구속됐다.

◆ '하나회' 실체가 드러나다

1973년 3월 말,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박정희에게 윤필용사건 수사결과를 보고했다. 박정희는 구속된 10명을 모두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이후락 중정부장의 주변도 철저히 조사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강창성은 "각하, 그러나 이 부장은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는데 윤 소장과 함께 각하의 최측근들을 모두 자르는 것은 국민의 눈에 좋지 않습니다."

이어 “그보다도 이번 사건수사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윤 소장을 추종한 비밀사조직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강 사령관은 육사 14기까지의 하나회 핵심 20여 명의 명단을 내놓았다. 그러자 박정희는 명단을 들여다보다가 "그냥 두고 가지...."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은 신군부 세력에 의해 정치적 탄압을 받았던 대표적 인물이다.


강 사령관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락 부장까지 손댈 뜻을 밝힌 대통령이 군 장교들의 비밀사조직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이상했다.

결국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에서 재판이 열렸다. 강창성의 보안사령부에서는 관련자들을 조사하였으나 ‘쿠데타 모의 혐의’는 입증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대로 넘길 수 없었기에 업무상 횡령, 수뢰, 군무이탈 등 8개의 죄목을 적용해 윤필용을 비롯하여 손영길 등 장성 3명과 장교 10명에게 1~15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윤필용·손영길 장군이 구속되자 이들과 가깝던 장교 30여 명이 군을 떠났고, 결국 전두환이 하나회 최고 리더가 되었다.

강 사령관은 하나회를 뿌리 뽑으려고 하였으나 결국 박정희의 눈 밖에 나 제3군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되었고, 1980년대 권력을 잡은 하나회 세력들에 의해 삼청교육대로 보내졌다. 

◆ '유운학 중령 월북사건'...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되다.

1977년 10월 20일 육군 20사단 대대장 유운학 중령이 무전병 오봉주 일병과 함께 월북한 사건이 있었다.





비무장지대 내부 소로나 수색정찰로 등에는 ‘귀순자 유도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이 안내판은 탈북자들이 지오피(GOP) 철책선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이정표 기능을 한다. 


이 사건으로 육군의 군사교리와 전술 및 작전에 관한 사항 등의 전면적인 수정이 불가피했다. 사건 당일 유 중령의 월북을 보고받은 박 대통령은 격노했다.

그 자리에서 재떨이를 던지며 20사단을 비무장지대에서 빼라고 지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진종채 보안사령관은 2군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1979년 2월 중순, 국방부장관 노재현이 신임 보안사령관에 전두환 1 사단장의 인사안을 갖고 청와대로 향했다. 박정희는 인사자력표를 들여다보다가 한 마디 했다.

"이제 막 사단장을 마쳤는데 너무 이르지 않을까." 보안사령관은 통상 군단장을 마친 중장급에서 발탁함으로써 군부 내에서 우위에 서게 하는 인사원칙 기준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 인사에는 노재현 국방장관의 노력이 보태졌다고 한다. 노재현 장관과 전두환은 1969년 서종철이 육군참모총장을 할 무렵 참모차장은 노재현, 전두환은 총장실 수석부관이었다. 

영남군벌 내부에서 이미 구수협의를 거친 노재현은 자신 있게 밀었다. “각하, 서종철 안보특보나 진종채 전임 사령관도 이만한 적임자를 찾기는 쉽지 않다는 의견입니다.”





1978년 제3땅굴을 순시하는 노재현 국방장관과 전두환 1사단장.


8개월 후 10·26 정국에서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국가권력의 실권자가 되는 보안사령관에 전두환 1 사단장을 임명하는 파격 인사가 이렇게 결정됐다.

그즈음 하나회는 육사 11기부터 20기까지 20명 이상의 사단장과 공수여단장, 그리고 80명 가까운 연대장과 대대장 등의 실병 지휘관을 거느린 정치군벌로 성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