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서울신문STV

 

서울STV에서 주최하는 행사를 안내해드립니다.

>

[歷史콘텐츠?]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 '나'동...현대사를 뒤흔든 총성이 울렸다.

편집인 2024-01-22 14:12:30
1968년 1월21일,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로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총 31명 중 투항한 김신조만 살아남고, 도주한 2명을 제외한 나머지 28명은 모두 사살됐다.




사모바위 옆 김신조 은신처, 1.21사태 때의 총탄 흔적이 남아 있는 1.21소나무


이튿날 생중계로 진행한 기자회견장에서 김신조에게 침투 목적을 묻자 "내래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말해 세간에 충격을 안겼다. 

이 사건으로 주민등록번호 탄생, 병사들의 복무기간 연장 등과 함께 박 대통령의 지지 기반에 변동이 생기기 시작했다.

◆ 박정희, 윤필용을 택하고 김재규를 좌천

김신조의 '모가지' 발언으로 5.16 군사정변 이래 박정희가 신뢰했던 방첩대장 윤필용(1927~2010)은 해임되고, 김재규(1926~1980) 6군단장이 임명됐다. 

육사 기수로는 김재규(2기)가 윤필용(8기)보다 선배지만 나이는 한 살 차이였다. 방첩부대장에 부임한 김재규는 부대 명칭을 육군보안사령부로 고치고, 부대장을 군단급 중장으로 격상시켰다. 

한편, 1970년 박정희로부터 재신임을 얻은 윤필용이 대통령을 경호하는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부임하며 새롭게 군부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수경사 일부 장교들은 "수경사가 대통령 신변을 지키는 부대인데, 보안부대가 감시를 하고 동향보고를 할 필요가 있느냐"며 보안사에 대해 배타적으로 나왔다. 

특히 경복궁 소재 수경사 30대대의 경우 '경호임무 수행 중'이라는 이유로 보안반의 부대 출입을 막기도 했다. 





하나회 장교 다수를 직계 부하로 거느린 '군부 강자' 윤필용 수경사령관(왼쪽)에게 처음 견제를 시도한 장성이 김재규 보안사령관이다.


이런 와중에 김재규는 1971년 6월 대통령의 재가 없이 윤필용을 견제하기 위해 24시간 시간별 동향보고와 감청요원을 투입해 윤필용의 전화를 감청, 보고를 지시했다.  

결국 사달이 났다. 윤필용 감청사건으로 박정희는 윤필용을 택하고 김재규는 강원도 최전방 3군단장으로 좌천시켜 버렸다. 

대통령과 동향이고, 육사 동기인데, 육군 중장이 소장을 못 이기고 물러났다는 점에서 박 대통령에 대한 엄청난 모욕감과 함께 분노를 품게 된 것이다.

◆ 소통령(小統領), 차지철

차지철은 공수단 대위로 5.16쿠데타에 가담해 박정희의 경호대원이었다. 1974년 광복절,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으로 물러난 박종규를 대신해 경호실장이 되었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철 경호실장(오른쪽 끝) 전두환 작전차장보(오른쪽 두 번째) 등 경호팀과 기념촬영을 했다.


1974년 박정희는 경호실장을 차관급에서 장관급으로 격상했다. 심지어 차관급인 현역 중장을 경호차장으로 두었으며 현역 육군 준장을 차장보에 임명하였다.?




노태우 행정차장보, 전두환 작전차장보, 차지철 경호실장


당시, 전두환과 노태우 둘 다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출신이다. 차지철, 전두환과 함께 청와대에서 근무한 군 출신 경호원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전두환은 차지철보다 세 살이 많고 정규 육사 출신인데도 간부후보 출신으로 2년 선임인 차지철에게 낯간지러운 일을 많이 했다.





국기하강식


육군 준장 전두환이 경호실에서 매주 시행하는 국기하강식 때마다 제병지휘관이 돼 ‘경호실장을 향하여 받들어 총!' 구령을 하며 부대를 지휘했다. 

이어지는 분열식에선 단상의 차지철을 향해 '우로 봐' 하면서 긴 칼을 들어 경례를 붙였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측은한 생각까지 들었다."

차지철은 경호실 산하 부대들을 창설한 뒤, 박정희의 친위대로 만들려고도 하였다. 경찰·군부대들의 101경비단, 22경찰경호대, 55경비단, 33헌병대 등 독특한 부대명도 차지철이 작명한 것이다.





청와대 앞 민방위 훈련을 지휘하는 차지철, 차지철 왼쪽이 노태우, 보도블럭 아래로 내려와 있는 자가 전두환.


1978년, 비상시에는 경호실장이 수도경비사령부도 지휘할 수 있게 법까지 개정했다.일개 민간인이 군의 수도 방어 부대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 김재규, 자신이 2인자라 확신했는데

3군단장을 끝으로 군을 떠난 김재규는 유정회 국회의원, 건설부 장관을 역임한 후 1976년 12월 대통령의 최측근 권력인 중앙정보부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중정부장이 되고 나서는 박 대통령이 명실 공히 자타가 인정하는 2인자 자리에 자신을 재기용했다고 확신했다.

차지철은 비서실장이 김계원으로 바뀐 1979년부터는 경호실에서 비서실 업무를 간섭했다. 박정희에게 올라가는 보고서와 결제서류에 독극물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며 경호실을 거치도록 했다.

또한, 중앙정보부와의 갈등으로, 차지철은 경호실의 공금으로 대규모의 "사설 정보팀"을 운영했다.





1975년 10월 14일 영동-동해고속도로 개통 테이프를 끊은 직후 환영하는 주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답례하는 박정희 대통령. 뒤로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건설부장관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에게 보고할 때도, 경호실장이 동석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는 등 나이도 7~8년 어리면서 김재규에게 항상 김부장이라 부르기도 했다.

차지철의 안하무인적 행동이 김재규를 자극했고, 버르장머리를 모르는 차지철을 한사코 편드는 박정희가 미웠다. 당시 비서실장 김계원의 증언에서 켜켜이 쌓인 김재규의 분노를 엿볼 수 있다.

"형님, 각하께 보고하러 가면 차지철이가 먼저 보고하고 있어요. 차지철이가 나온 뒤에 들어가 각하께 말씀드리면 각하 표정이 시큰둥해요. 다 아는 이야기를 왜 반복하느냐는 식이에요."

◆ 김재규, 차지철과 통화후 박선호, 정승화, 김정섭과 순차적인 통화

김재규와 차지철은 부마항쟁 등의 일들로 마찰을 빚어 오다 10월 26일 오전에도 차지철과 김재규는 갈등을 빚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삽교호 준공식에 참석해 배수갑문 스위치를 누르는 모습. 고인의 생애 마지막 공식행사 사진이다.


이날 박 대통령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KBS 당진송신소 준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당진송신소는 대북방송 송신 기능 때문에 김재규가 있던 중정이 관리하던 보안시설이었다.

김재규로서는 참석할 명분이 있었는데, 차지철은 "지금 시국이 어느 때인데 정보부장까지 서울을 비우면 어쩌란 말입니까? 김 부장은 참석하지 말고 자리를 지키세요"라며 면박을 줬다.

10월 26일 오후 김재규는 연회를 준비하라는 차지철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끊은 김재규는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전화를 해 오늘 저녁 6시에 각하하고 술자리가 있다고 했다.





김상헌의 옛집 ‘무속헌’ 터에 들어선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안가 ’나’동. 여기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 대통령을 저격했다. 


박선호에게 전화 후, 김재규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궁정동 안가 본관(박정희 : 궁정동 안가 별관)에서 저녁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김재규는 김정섭 제2차장보에게 전화를 해 내가 오래전부터 정 총장하고 약속이 있었는데, 갑자기 각하와 술자리 때문에 나 대신 정 총장하고 만찬을 하라고 지시했다.

◆ 10월 26일, 최후의 만찬

연회중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신민당 공작은 어떻게 되었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김재규는 "아무래도 신민당 주류들이 강하게 나와서 당분간 시끄러울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10 .26 당시 연회장. 오른쪽 상단에 차지철 경호실장이 쓰러져 있다.


그러자 옆에서, 차지철은 "신민당 놈들 중에 국회의원 하기 싫은 놈 하나도 없어요. 까불면 학생이고 신민당이고 그까짓 놈들 전부 탱크로 싹 깔아뭉개야 합니다."라는 살벌한 말을 뱉었다. 

박정희는 "오늘 삽교천은 공해도 없고 공기도 깨끗하던데, 신민당은 왜 그 모양인가?"라며 혀를 찼다. 차지철은 또 다시 "그깟 새끼들 싹 밀어버리겠다."라며 과격한 소리만 되풀이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혼잣말로 "요새 정보부는 부마사태 처리도 그렇고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비아냥거리면서 김재규를 자극했다.

김계원은 이런 상황을 풀어보려고, 오늘 삽교천 분위기가 좋았다는 등 화제를 전환하려 했지만, 차지철이 수시로 김재규에게 시비를 걸어대는 바람에 무소용이었다.

저녁 6시 30분쯤 차지철은 "깔아 뭉개버리겠다."라는 말을 던져놓고, 이후, 옆 대기실로 가서 기다리고 있던 신재순과 심수봉을 데리고 들어왔다.





10.26사건 12일 뒤인 1979년 11월7일 공개된 현장검증. 차지철 경호실장을 향해 권총 한 발을 쏜 김재규가 앞에 앉아 있던 박정희 대통령을 쏘는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김재규는 7시 10분께 잠깐 들러 정 총장에게 실례를 사과했다(이때 그는 2층 집무실에 들러 권총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갔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인 7시50분께 난데없는 총성이 울렸다.

김정섭 차장보가 궁정파출소에 확인을 지시하고 다시 앉았을 때 김재규가 피묻은 와이셔츠 차림으로 뛰어들어와 벌컥벌컥 물을 마시더니 김 차장보와 정 총장을 차에 타게 했다.

차 속에서 정 총장의 질문을 받은 김재규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밑으로 돌리며 "이 분이 돌아가셨습니다"고 말했다.

◆ '김학호 시작해'

10.26 당시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이었던 김학호라는 사람이 있다. 김재규가 보안사령관 할 때에 김학호는 보안사 참모장을,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으로 갈 때에 김학호를 별두 개로 만들어 데리고 갈 정도로 가까웠다.

김학호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밤사이에 130명만 연행하면 쿠데타는 성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재규와 김학호는 쿠데타 연습 즉 '김학호 시작해'를 여러 번 학습했다.





퇴계로 쪽에서 본 남산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본청 전경.


김재규가 '김학호 시작해' 하면 “김학호는 검거대상자 전원을 잡아들이고 김재규는 혁명위원장이 되어 긴급조치 해제, 양심수 석방, 신문사 및 방송국 장악하여 진정한 민주국가의 길로 나가자”라고 공포하는 것이었다.

김학호는 그런데 왜 당일날 김재규가 '김학호 시작해'란 암호를 사용하지 않았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 김재규는 왜 용산으로 갔을까?

3·1고가도로에 들어섰을 때 김재규가 평상시 연습했던 남산 중앙정보부로 가지 않고 용산 육군본부로 향한 것은 김재규가 확실히 믿는 사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79년 10·26사태 한 달 전,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는 김재규와 만나 한국 정치에 관해 우려를 표하며 ‘평화적 정권 교체’를 논했다.

비록 미국 정부와 김재규 사이에 계획적인 사전 공모는 없었으나, 박정희 정권 교체에 대한 이심전심 격인 묵시적 사전 동조가 있었던 것이다.

원래 김재규는 미 중앙정보국(CIA)와 굉장히 친밀한 관계였다. 일설에 의하면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의 동향을 CIA에 보고했다는 얘기도 있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핵개발을 탐탁치않게 생각했다. 박정희가 핵개발에 나선 것은 1974년부터다. 핵무기 전용 미사일 개발을 위한 '890계획'이라는 비밀 작전도 이때부터 전개되었다.

CIA가 1975년 초 핵무기 제조 비밀 계획에 대한 첩보를 입수해 본국에 타전하면서 미국 행정부의 한국 정부에 대한 핵무기 개발 계획 포기 압박이 시작되었다.





1979년 6월 30일 당시 청와대에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을 맞이하는 박정희 대통령.


미국 카터 행정부는 1977년 주한미군 1천 명을, 1978년 5백 명을 철수시킨 뒤 1979년 철수 계획을 중단했다.

박정희는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개발과 주한미군 철수 방침을 '미친 짓'이라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 미국, 유신정권 대체할 세력...육사 11기 주목

이제 박정희가 죽었으니 민주주의가 오지 않겠느냐 당시 많은 국민들은 기대를 했지만 미국의 생각은 달랐다.

미국은 박정희의 바로 뒤에 민주주의 정부가 오는 건 위험하다고 봤다.





1955년 10월 4일 서울 태릉 화랑대에서 열린 육사11기 졸업·임관식에서 생도들이 분열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이 박정희 정부를 대체할 세력으로 주목한 것이 미국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4년제 정규 대학 과정을 마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육사 11기라는 것이다.  

미국은 김재규에 대해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상황을 끌고나갈 인물이 전혀 안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김재규는 한번 써먹고 버렸다.

미국이 뒤에 있는 것처럼 하여 김재규를 10.26에 개입시켜 박정희를 죽게 하고,  육사 11기에게 정권을 잡게 도와주고 그것을 미끼로 한국의 자주국방력을 견제하려 했던 미국의 이중플레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