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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콘텐츠?]격동의 시대 '1979년'...YH무역 사건, 유신 정권 붕괴의 단초가 되다.

편집인 2024-01-15 12:17:55
1979년 10.26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부터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암시하는 파열음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대내적으로는 민주화 운동과 야당의 투쟁이 절정에 이르렀고, 대외적으로는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의 선거공약 주한미군 철수건으로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미국과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 YH무역농성사건

YH무역 창립자 장용호는 잘나가던 YH무역을 동서인 진동희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에서 '용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백화점, 호텔 등을 지었다.

진동희는 YH무역의 사장이 되어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상여금 10억 원을 빼돌리고 해운회사를 설립했다.

이처럼 경영진의 잇따른 횡령과 무리한 사업 확장, 제2차 석유파동에 따른 수출 감소로 인해 가발산업이 쇠퇴하자 YH무역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경영진은 노동자를 해고하고, 일방적으로 폐업을 공고하면서 이 위기에 대응하고자 했다. 1970년 4천 명에 달했던 노동자들은 1976년에 1,80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1979년 3월, YH무역은 일방적으로 폐업을 하겠다고 선언했고, 노동자들은 이에 반대하여 농성을 시작했다.

아울러 노동자들은 은행과 노동청 등을 찾아다니며 장용호가 미국으로 빼돌린 돈을 회수해 공장을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한편, 자체적으로 공장을 가동했다.





YH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투쟁


결국 자치경영 두 달만인 8월 6일, 회사 측은 2차 폐업공고를 붙였고, 길거리에 나앉게 된 여성들은 신민당사 농성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선택했다.

8월 9일  YH무역 여성 노동자 187명이 회사의 불법 해고와 일방적인 폐업공고에 항의하며 마포구 도화동에 있던 신민당사에 들어가 농성을 벌였다.

청와대 긴급 회의 결과 YH 무역 여공들을 강경 진압하기로 결정됐다. 어둡고 고요한 밤거리에 차량의 경적소리가 길게 세 번 울렸다. 101호 진압작전의 신호였다.






8월 11일 새벽 2시, 경찰 1천여 명이 신민당사로 진입하여 울부짖는 여성들을 곤봉으로 두들기고 한 사람에 4명씩 달려들어 사지를 들어 계단으로 끌어내렸다. 

반항하면 그 자리에서 군화발로 걷어차고 깨진 유리병을 주워 동맥을 끊으려던 몇몇 여성들도 집단구타를 당해 거의 기절한 상태로 끌려 내려가 철망 두른 경찰버스에 던져졌다. 

이 와중에 김경숙(당시 21세)이 왼쪽 팔목 동맥이 절단되고 타박상을 입은 채 당사 뒷편 지하실 입구에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고, 인근 녹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곧 숨지고 말았다.

김경숙 사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광주에 있던 김경숙의 가족에게 형사가 찾아와 부고를 알리며 몇 시간을 달려서 도착한 곳은 수원의 한 여관이었다. 

유족들이 병원에 도착한 건 이틀 만이었다. 김경숙의 시신은 장례식도 하지 않고 바로 화장터로 향했고, 유족들에게 위로금이라며 돈 봉투가 쥐어졌다.





옛 신민당사터를 알리는 삼각형 표지판에는 YH무역 노동자 김경숙이 경찰 진압과정에 사망한 사실이 적혀 있다. 삼각형 인권 표지판은 국가폭력을 의미한다.


당시 경찰은 "진압작전 개시 30분 전인 8월 11일 새벽 1시30분에 김씨 스스로 동맥을 끊고 4층 강당에서 건물 뒷편 창문 아래로 투신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신민당은 김경숙 씨 사인 규명, 책임자 문책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종교계와 인권운동단체, 진압과정에서 폭행을 당한 기자들은 일제히 정부를 비판했다. 

◆ YS 국회의원 제명과 부마항쟁

YS도 특유의 ‘강경 투쟁’을 지속하면서, 박정희 정권을 압박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YS의 <뉴욕 타임스> 인터뷰를 문제 삼아, YS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했다.






김영삼은 의원직 제명 직후 "아무리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외쳤다. 이 말이 예언처럼 실현됐다.

신민당 의원들의 총사퇴 결정과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과 마산에서 부마항쟁이 터지면서 유신체제는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생 500명이 반정부 시위를 벌였고 부산 시내로 시위를 넓혀가자 동아대학생 1000여명도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오후 7시, 시민도 참여하면서 부산 부영극장 앞 육교를 중심으로 시청 앞에서 충무동에 이르는 4차선 도로와 광복동 일대를 5만여 명에 이르는 인파가 거리를 메웠다. 

'독재를 타도하자!'는 구호가 거리에서 거리로 이어지고, '유신철폐!' '언론자유' '김영삼 총재 제명을 철회하라!'는 구호가 메아리쳤다. 





부마항쟁 당시 비상계엄이 실시되면서 탱크가 도심에 진주하자 시민들이 놀란 표정으로 탱크를 바라보고 있다.


18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서울 지역의 공수부대 2개 여단이 투입되었으며 계엄군이 진주했다. 이날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부산을 방문하고 계엄합동수사본부 설치를 지시했다. 

7년 만에 비상계엄령  발동과 함께 거리마다 계엄포고문과 박정희의 담화문이 붙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한 이 담화문은 '유신헌정은 거듭된 국민적 합의에 의하여 선택 정립된 것이며…… 이 길만이 우리 3,700만 국민의 생존권을 지키고……' 운운했다.





부마항쟁 당시 게엄령 발표 포고문을 읽는 시민들


대학 휴교, 모든 집회, 시위 등 단체활동 금지, 언론·출판 검열, 사업장 이탈·태업 금지, 야간통행금지 연장(22 : 00∼04 : 00), 영장 없는 체포를 알리는 포고문이었다.

그러나 성난 시민의 분노를 제압하지 못하여 오히려 이웃 마산으로 시위의 불길이 번져갔다. 

마산은 부산보다 더 격렬했다.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 당사, 파출소, 방송국이 불타고 파괴되었다.  

10월 20일 0시를 기해 마산시와 창원출장소에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그리고 육군과 경찰 그리고 해군을 시위 진압에 투입하기 위해 훈련에 차출했다.





부마항쟁때 투입된 공수부대 모습이다. 총에 대검이 꽂혀있다.


그리고 마침내 부산과 마산에 육군 특전사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과 제3공수특전여단, 해군 제1해병사단의 제7연대와 2연대가 계엄군으로 들어왔다.

부산에 있던 계엄사령관과 3공수 특전여단장, 전두환 국군 보안사령관이 이 모든 계획을 총지휘했다. 

전두환은 이때의 경험으로 광주 민주화운동 탄압도 계획하고 더 용의주도하게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마항쟁을 눈으로 보고온 김재규는 박정희와 차지철의 발언을 듣게 된다.






박정희는 4.19때 곽영주나 최인규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했지만, 자신이 직접 발표하면 대통령인 자신을 누가 사형시키겠는가?라며 사태가 심각하면 발포명령을 하겠다. 

차지철은 여기에 덧붙여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는 100만~200만명 희생시키는 것 쯤 별 문제겠습니까?"라는 미친 발언까지 했다.

표면적으로는 부마민주항쟁은 이렇게 끝났지만 박정희 유신 정권이 끝나는 계기인 10.26사건을 발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