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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콘텐츠?] 항일무장투쟁의 전설,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3대 전투

관리자 2023-09-22 10:59:13

삼둔자, 봉오동, 청산리전투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정미7조약 체결, 8월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으로 국권은 허울만 남았다.

일제는 1907년 9월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 시행으로 포수들의 수렵용 총기를 회수함으로써 조선인들의 저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했다.

이에 홍범도(1868~1943)는 1907년 11월 포수들 중심의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후치령(1335m) 등 함경도 개마고원 일대에서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9년 즈음 러시아 연해주 망명 직후 42살의 홍범도(왼쪽 사진). 1912년 즈음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광산·철도 노동자로 생활하던 44살의 홍범도. 

그의 의병부대는 이후 일본군과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하며 일제의 침략에 상당한 타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조선통감부 등 일본 당국의 토벌과 탄압이 강화되고, 식량과 탄약이 떨어지는 등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결국 1908년 11월 경 러시아 연해주 지방으로 망명하여 후일의 항일투쟁을 도모하였다.

홍범도는 1910년 6월부터 연해주의 권업회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참가하는 한편, 만주를 오가며 차후에 있을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1919년 3·1운동으로 한민족의 독립운동이 고조되고 유리한 정세가 조성되자, 연해주 일대에서 모집한 독립군 200여 명을 이끌고 북간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 국내 첫 진공작전 개시

1919년 8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처음으로 두만강을 건넜다. 나라를 빼앗긴 지 10년 만에 전개되는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의 시작이었다.

대한독립군은 갑산과 혜산진 등 국경에 주둔한 일본군을 타격했고 그해 10월엔 압록강을 건너 만포진과 강계까지 진출했다.




독립군이 내륙까지 들어와 공격하자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다.

더 큰 충격은 만주 여러 지역의 무장 세력들이 큰 규모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1920년 5월 28일 봉오동에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1883~1924)의 국민회군, 최진동(1882~1945)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가 결성되었다.

일제의 정보 보고는 이 부대의 규모를 최진동 계열 약 670명, 홍범도와 안무 계열 약 550명 등 1,200여 명으로 추정했다.

1920년 3월부터 6월까지 독립군은 총 32회의 국내 진공작전을 실시하여 일본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

독립신문 기사에 의하면 1920년 3월부터 6월 초까지 우리 독립군이 일제 관공서를 파괴한 곳이 34개소에 달했다.

◆ 삼둔자전투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하기 위해 봉오동에 집결한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은 1920년 6월 4일 새벽, 박승길(1893~1960)이 이끄는 신민단 대원 24명은 두만강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있는 일본군 초소를 습격하여 섬멸시키고 귀환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삼둔자 전투 시작, 삼둔자 전적지 현재의 모습

독립군의 동향을 보고받은 일본군은 오전 10시경 니미 중위가 지휘하는 남양수비대 29명을 출동시켜 두만강을 건너 삼둔자 마을로 독립군을 추격해왔다.

하지만 일본군은 독립군 추격에 실패했고,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소식을 접한 독립군 사령부는 삼둔자 서남쪽 범진령 일대에 1개 소대 병력을 매복시킨 뒤에 일본군을 그곳으로 유인하였다.

그리고 6월 6일 오전 10시 무렵에 일본군이 그곳으로 추격해오자 공격을 가해서 궤멸시켰다. 이것이 봉오동전투의 서막이 된 삼둔자 전투이다. 

일본군은 삼둔자전투 참패를 설욕하고, 조선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야스카와 소좌의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했다.

◆ 봉오동(골)전투

월강추격대대는 1920년 6월 6일 밤 9시부터 두만강을 건너 이튿날 새벽 3시 30분에 니미 중위의 수색대와 합류하여 안산 앞쪽에 집결하였다.

합류한 일본군은 안산 일대의 마을들을 수색하면서 독립군들로 추정되는 병력들을 확인하고 교전이 벌어졌다.




이 시기 일본군들이 봉오동을 향하고 있다는 낌새를 알아 차렸던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독립군을 봉오동 상촌 험준한 고지에 분산 매복케 했다.

이화일(1882~1945) 소대를 월강추격대대가 쳐들어오는 길목에 내보내 교전하는 척하면서 봉오동 골짜기로 후퇴케 하여 그들을 유인했다.

삼면 고지에 매복한 독립군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면서 시작된 봉오동전투는 3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사상자가 늘어나자 월강추격대대는 도주하기 시작했다.

독립군 제2중대장 강상모(1894~1944)는 부하들을 이끌고 도주하는 적을 추격, 월강 추격대대를 더욱 혼비백산케 했다.

당시 중국 〈상해시보〉는 독립군이 일본군 월강추격대대를 150명이나 사살하여 크게 이겼다고 보도했다.


https://youtu.be/z7gXvN8U2gY

봉오동전투는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한 본격적인 전투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 김좌진 '백운평', 홍범도 '완루구' 청산리전투 전개

봉오동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1920년 8월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수립하고 대규모 병력을 꾸렸다.

그러나 대병력이 도강하면 국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훈춘 사건'을 조작했다. 중국 마적단에게 돈과 무기를 주면서 훈춘 일본 영사관을 공격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만주 군벌 장작림(張作霖)에게 중국군이 한국독립군을 토벌하지 않으면 일본군이 만주에 직접 출병하여 독립군을 토벌하겠다는 위협에 장작림은 굴복했다.

이에 중국육군 제2혼성여단 보병 15단장 맹부덕(孟富德)을 사령관으로 하여 한국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출동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맹부덕과 중국군 간부들 가운데에는 '불령선인이라 하는 자는 정치범이므로 중국으로서는 이를 토벌할 이유가 없다"고 하는 등 내부 반발도 심했다.

맹부덕은 독립군과 비밀협상을 벌여 "독립군 근거지를 일본측 눈에 잘 띄지 않는 삼림지대로 옮기는 근거지 이동을 단행하고, 중국군이 토벌에 나서기 전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에 필요한 시간을 준다"는 내용 등을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만주의 독립군들은 기존의 기지를 버리고 백두산 산록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홍범도 부대는 1920년 9월 하순 화룡현 이도구 어랑촌 부근에 도착했다. 

한편 서일(1881~1921)과 김좌진(1889~1930)의 북로군정서 600여 명도 10월 중순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입구에 도착하였다.

청산리는 서울 면적의 5배인 광활한 산악지대로 청산리전투는 일주일 동안 청산리 곳곳에서 벌어진 전형적인 유격전이었다.

청산리전투는 10월 21일 오전 9시30분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이 백운평에 매복후 추격해오는 일본군을 공격함으로써 전투가 시작되었다.

홍범도 장군의 대한북로독군부는 10월 21일 저녁부터 22일 새벽까지 완루구에서 남북으로 공격해오는 일본군을 맞아 치열한 야간전투를 벌였다. 

홍범도는 일지에서 이날의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날이 밝자 대포소리 한 방 나더니 사방으로 사격소리가 그치지 않고 단박에 말리고 민간촌에 일본군이 달려들더니 나의 군인 520명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때려치듯 막 사격하니까 적들이 혼란에 빠져 헛총질을 해댔다.

밤이 삼경이 되도록 진을 풀지 못하고 밤새워 공격을 감행하여 일본군을 거의 다 잡았다.”

◆ 어랑촌전투, 김좌진·홍범도 연합부대 무적 황군 신화 깨다

1920년 10월 22일 새벽 천수평 전투에서 김좌진의 지휘하는 북로군정서 부대는 일본군 기병 부대를 기습 공격하여 섬멸하였다.

그러자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동지대의 예비대를 투입하고, 중포병 부대의 포병 화력을 이용하여 대규모 공격을 하였다.

북로군정서는 어랑촌으로 이동후 가장 높은 고지인 874고지를 선점하였다. 




청산리 어랑촌 전투 상황도

10월 22일 오전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북로독군부 연합부대 2,000여 명과 중화기로 무장한 일본군 동지대(東支隊)의 어랑촌 결전이 시작되었다.

북로군정서 군이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대규모 병력과 화력에 밀려 시간이 지날수록 고전할 수 밖에 없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일본군은 2개 대대, 포병 1개 중대 총 1,300여 명의 지원부대가 어랑촌에 합류하여 주변 고지를 점령하면서 북로군정서를 압박하였다. 

특히 874고지의 측면을 파고들면서 배후를 노리는 일본군의 공세에 김좌진 부대는 큰 위기에 봉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범도 부대가 측면 783고지를 장악하고 우회하던 일본군과 일본군 포병부대에 기관총 공격을 가하였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자 야간 습격을 두려워한 일본군은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청산리대첩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천수평, 어랑촌, 천보산 등지에서 10여 차례의 전투다.

이 모든 전투에서 독립군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자칭 '무적 황군'이라던 일본군은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중국 길림성 화룡시 청산촌에 2001년에 세워진 기념비.


청산리 승전 후 서일은 "김좌진 부하 600명과 홍범도 부하 300여명이 일본군 1천300여명을 격살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청산리전투에서 공을 세운 이범석이 자서전에 기록으로 남기는 과정에서 홍범도 부대의 활약상을 적지 않아 상대적으로 기록과 자료가 많이 남겨진 김좌진 장군이 주축이 되어 승리한 것으로 기억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