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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콘텐츠⑭] 푹푹 찌는 삼복(三伏)더위, 옛 선조들의 여름나기

작성자 2023-08-09 14:18:48
삼복(三伏)은 24절기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예로부터 지금까지 국민들이 가장 많이 챙기는 속절(俗節)중 하나가 되었다.

복(伏)은 '엎드리다'는 뜻으로, 사람 인(人)과 개 견(犬) 자로 이루어져 있어 '더위에 지쳐 사람이 개처럼 엎드려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라고 한다.

그래서 삼복에는 '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대지로 내려오다가 여름의 무더운 기운을 두려워해 세 번 엎드리고 나면 더위가 지나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우연일까, 영어로 '삼복더위'를 뜻하는 말은 'Dog-day'이다. 우리나라처럼 복날의 날짜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름의 덥고 무더운 날을 뜻한다.



김득신(1754~1822) ‘여름날의 짚신 삼기’. 

김득신(1754~1822)의 <여름날의 짚신 삼기>에서도 여름날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웃통을 벗고 있는 인물들과 더위에 지쳐 혀를 길게 빼고 있는 강아지를 보면 당시 한여름의 무더위가 실감 나게 느껴진다.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던 시절, 우리 선조들은 어떤 방법으로 더위를 쫓았을까.

◆ 왕들의 여름나기

조선 왕들의 여름 휴가는 대체로 소박했다. 사실상 휴가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병 치료를 위해 온천에 가는 경우를 제외하면 장기간 궁궐을 벗어나는 일은 드물었다.

궁궐 밖으로 피서할 수 없었던 왕은 경복궁 경회루와 창덕궁 후원 등에서 무더위를 피하곤 했다. 

경복궁 경회루는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고 바람이 잘 통하기 때문에 피서에 안성맞춤이었다. 



경복궁 경회루, 창덕궁 후원의 여름

특히 자연 산수와 계곡으로 둘러싸인 창덕궁 후원(??後苑)은 조선시대 왕들로부터 사랑받던 피서지였다. 

반면 연산군의 피서법은 다른 왕과는 확연히 달랐다. 얼음을 대형 놋쇠 쟁반에 가득 담아 동서남북 사방에 놓고 마치 에어컨처럼 사용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뱀 우리 위에 대나무 틀을 놓고 그 위에 앉아서 더위를 식혔다고 한다. 냉혈 파충류인 뱀과 대나무의 냉기를 이용한 다소 엽기적인 피서법이었다.

호학군주 정조는 지족(知足), 즉 '만족할줄 앎'을 실천했다. 현재 자리에서 참고 견디면 서늘해진다는 것이다. 마음으로 여름을 이긴 정조에게 가장 좋은 피서법은 독서였다.

◆ 선비들의 여름나기

조선시대에는 의관정제(衣冠整齊)라는 말이 있다. 의관정제란 "격식을 갖추어 두루마기나 도포를 입고 갓을 쓰고 옷매무시를 바르게 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선비들의 기본 예의였기에 품위를 잃지 않는 차원에서 더위를 식혔다.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 폭포를 감상하는 '관폭(觀瀑)', 물을 보며 더위를 식히는 '관수(觀水)'를 즐겨했다. 




이경윤(1545~1611) '고사탁족도', 정선(1676~1759) '고사관폭도', 강희안(1417~1464) '고사관수도'

다산 정약용(1762~1836)선생은 '소서팔사(消署八事)'의 피서법을 소개하고 있다. 더위를 이기는 법 8가지다.

솔밭에서 활쏘기, 느티나무 아래서 그네타기, 빈 누각에서 투호놀이, 대자리에서 바둑두기, 연못에서 연꽃 구경, 숲에서 매미소리 듣기, 비오는 날 시 짓기, 달밤에 물에 발 담그기 등이다.

지금 실정에 맞지 않는 것도 있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더위를 견디고 여름을 보냈다.

◆ 백성들의 여름나기

얼음이라곤 구경도 못 했을 백성들은 그저 부채질을 하고 통풍이 잘 되는 모시옷을 입거나 잠잘 땐 대나무로 만든 '죽부인'을 옆에 놓아 더위를 견뎠다. 

그리고 냇물이나 강에서 고기를 잡아 요리를 해 먹고 친목을 도모하는 천렵(川獵)으로 더위를 달래기도 했다. 

천렵은 피서만이 아니라 몸보신을 위한 놀이였다. 더위를 이겨내려면 영양보충이 필수였다. 물고기도 좋은 영양식이었다.




김득신 '강변회음도'


긍재 김득신의 <강변회음도>에는 천렵 광경이 실감나게 담겨 있다. 바람이 시원한 강가에 물고기 한 마리를 중심으로 6명의 어른이 둘러 앉아 있다. 

가마우지가 배에 세워진 대나무 위에서 정겹게 놀고 있다. '물매'(물에 사는 매)라고도 불리는 가마우지는 예로부터 고기잡이 도구이기도 하다. 

가마우지 낚시 방법은 간단하다. 가마우지의 목을 끈으로 묶은 뒤 강에 풀어둔다. 그러면 가마우지가 물고기를 잡되 삼키지는 못한다.

이때 부리에서 물고기를 꺼내면 된다. 지금 먹고 있는 물고기도 가마우지 낚시로 잡은 것 같다. 다 함께 먹고 마시며 즐겁게 보내는 모습이 생생하고 정겹다. 

◆ 여인들의 여름나기

한여름에도 치마 속에 속곳, 속바지를 겹겹이 챙겨 입어야 하는 여인들에게도 한여름은 고역이었다. 

조선시대 여인들이 한여름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날이 음력 6월 15일인 유두(流頭)날이다. 일부 지방에서는 유두를 '물맞이'라고도 한다.



이 날은 동네여인들이 개울가에 모여 머리를 감고 멱을 감으며 놀 수 있는 날이었다. 조금은 여성들의 노출이 허용되는 날이다 보니 남성들이 훔쳐보는 진풍경도 있었다.

한편 외부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사대부 집안 여성들은 독서를 하며 여름을 나기도 했다. 

18세기 후반 다양한 책을 구비해 놓고 돈을 받고 빌려주는 세책점(貰冊店·도서대여점)이 성행했다. 

규방 여성들은 여름철 피서로 친정으로 나들이 갈 때 무료함을 달래려고 세책점에 사람을 보내 책을 빌려 읽으면서 더위를 쫓았다. 

남성 중심적 세계에서 소외된 여성들에게 소설 읽기는 더위까지 잊게 한 최고의 피서법이었다.

◆ 특권의 상징, 빙표

우리 조상들은 무더위를 대비해 겨울에 강 등에서 얼음을 채취해 미리 얼음 창고인 빙고(氷庫)에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썼다.

얼음을 다루는 창고는 나라에서 운영했는데, 한양에는 종묘 제사를 위한 '동빙고', 신하와 어려운 백성을 위한 '서빙고', 왕실 전용 얼음을 위한 '내빙고'가 있었다.




1713년(숙종 39년)에 축조된 청도 석빙고(보물 제323호)


왕실뿐 아니라 지방관청에서도 빙고를 관리했다. 현재 남아있는 청도, 경주, 창녕, 안동, 영산 등의 석빙고 시설은 조선시대 지방에서 이용하던 얼음보관 시설이다.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얼음은 저자도(楮子島· 속칭 옥수동섬) 근처에서 음력 12월이나 1월 중 새벽 2시에서 해뜨기 전까지 얼음을 채취했다. 

얼음 1정의 크기는 길이 1척5촌(45㎝), 너비 1척(30㎝), 두께 7촌(21㎝) 정도로 무게는 5관(18.75㎏)인데 세 덩어리를 묶어 지게에 지고 옮겼다. 

얼음을 채빙하고 운송, 저장하는 일을 장빙역(藏氷役)이라고 하였는데, 부역 중 최악의 고역으로 꼽혔다. 장빙역을 피해 달아나는 부역민들이 속출해서 ‘장빙과부’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궁중에서는 삼복 때 고위 관료들에게 더위를 이기라는 뜻으로 빙표(氷票)라는 얼음쿠폰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빙표를 가지고 장빙고(藏氷庫)에 가면 얼음을 받아 갈 수 있었다. 빙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특권의 상징이었다. 

‘벌빙지가(伐氷之家)’가 권세가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된 것은 고위 관료들에게 얼음을 나눠준 오랜 전통에서 유래한다. 한여름에 얼음을 사용하는 것은 그 시절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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