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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콘텐츠⑬] 제국주의 전시장 '만국박람회', 순수하지 않았다.

관리자 2023-07-20 10:17:03
산업혁명 이후 산업 기술의 발달로 번영을 누리던 서양 열강은 자신들이 이루어 낸 산업화의 성과를 과시하고 보급하기 위해 대규모 박람회를 개최하였다.



수정궁은 1936년 11월 30일 화재로 인해 전소되었다. 

1851년 5월 영국이 수정궁(Crystal Palace)이라는 거대한 전시장을 짓고 여러 국가들을 초대하면서 만국박람회로 발전해 나갔다.

그러다가 1867년부터는 참가국들이 자국을 대표할 만한 전시장을 만들어 각자 전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 전시된 인간들

당시 박람회장에서 가장 인기를 끈 것은 살아있는 사람을 전시한 '인종관'이었다.

인종전시로 명명되는 인간동물원은 원주민을 야만인으로 재현해 백인의 우월성을 내세웠고, 식민지를 건설하는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인식을 전파했다.

19세기 초 '호텐토트의 비너스(Hottentot Venus)'라 불린 남아프리카 여성을 유럽에서 전시한 이래 인간동물원은 박람회 단골 레퍼토리였다. 




호텐토트의 비너스, 1904년 세인트루이스 박람회, 1958년 벨기에 브뤼셀 박람회


제국주의적 전시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인간전시 역시 확장되었다. 이러한 인간동물원의 백미는 1889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였다.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막 건설된 에펠탑 발치에 흑인 촌락과 카나크족의 식민지촌을 재현하고 박람회 기간동안 전시하였다.

흑인 촌락에는 세네갈과 가봉 출신 아프리카인이 배치되었으며, 카나크족의 촌락에는 뉴헤브리디스 제도(현재의 바누아투 지역 군도)등의 식민지 주민들이 배치됐다. 

유럽에서 시작된 인간동물원은 유럽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후에 미국, 일본, 호주에서도 전시가 열리면서 점차 일상화된 전시로 자리매김하였다.

1930년대 들어 영화의 출현과 대중적 관심의 변화로 인해 인간전시가 조금씩 쇠퇴해지면서 공식적으로 1958년 벨기에 브뤼셀 만국박람회까지 존속되었다.

◆ '대조선'...만국박람회 첫발을 내딛다

유럽에서 시작된 박람회는 신흥강국 미국으로 옮겨졌다. 1893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는 만국박람회가 5월부터 10월까지 시카고에서 열렸다. 

초대장은 1890년에 발송되었는데 조선은 오랜 시간 동안 그 초대에 대한 답을 하지않았다. 그러다가 1892년 시카고 박람회 참가를 결정했다.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 조선관 전경, 대조선(大朝鮮, Korea)이라는 국호와 태극기

칼럼니스트 다니엘 케인은 논문에서 고종이 박람회 참가를 결정한 이유에 대해 상세히 추측하고 있다.

'알렌(1858~1932)이 개인적으로 만국박람회에 참석하기로 한 것은 고종의 마음을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His decision to attend the fair in person was instrumental to Kojong's change of heart)

고종은 정경원(1851~1898)을 미국박람회 출품사무대원으로 임명하고 궁중 악사 10명 등 모두 13명을 미국으로 파견하였다.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는 조선이 공식적으로 참가한 첫 박람회였다. 당시 '대조선(大朝鮮, Korea)'이라는 국호와 태극기를 사용했다. 

특히 아악 연주단은 1893년 5월1일 시카고 만국박람회 개막식에서 조선의 음악을 미국의 클리브랜드 대통령 앞에서 연주하였고 감사의 인사를 받았다.

이것은 사상 최초로 우리 가락이 이역만리 미국 땅에 울려 퍼진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들 궁중악사 10명은 체류비 부담이 상당해져 5월 3일 귀국길에 올라야만 했다.

시카고 만국박람회는 공간을 백색도시와 미드웨이 플레이상스(Midway Plaisance)로 구분했다.

백색도시는 모든 건축물을 신고전주의 양식과 흰색으로 아름답게 배치시켜 붙여진 이름으로, 문명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반대로 미드웨이 플레이상스는 비백인들의 인종전시장이 되었고 아프리카 다호메이(베냉)부족 100여명이 벌거벗은 채로 전시되었다.

조선 전시관은 기와집으로 25평 전시실을 지어 전통복식과 도자기, 민예품, 갑옷과 투구, 가죽 신발 등을 진열했다.

그러나 현지 신문들은 일본 전시관의 40분의 1에 불과한 조선관이 '장난감 같다'고 평했고, 박람회를 참관한 윤치호는 '가슴이 메었다'고 일기에 적었다.

◆ 태극 문양, 북부 대륙횡단 노선을 달리다

기와를 올린 전시관 입구 상단에 태극기를 걸었다.





태극 문양 엠블렘을 달고 달리는 NPR 열차.

북태평양철도회사(NPR)의 임원이 시카고 만국박람회에서 본 태극기로부터 영감을 받아 북태평양 철도회사의 로고로 채택했다.

NPR은 미국 중북부 미네소타주에서 서북부 워싱턴주를 연결하는 철도 운영사로 본선 1만900㎞를 1883년 완공한 상태였다.

태극 문양 엠블렘은 NPR 기관차 앞머리에 부착돼 북부 대륙횡단 노선을 달려 미국인들의 눈에 익숙한 상징물이 됐다. 

이처럼 조선의 첫 박람회 참가는 미 대륙에 우리의 이미지를 알리는 뜻밖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 대한제국, 재정 여력이... 

1896년 1월 프랑스 정부는 조선 주재 프랑스 서리공사를 통하여 '예술품 및 공산품 세계만국박람회'에 조선을 정식으로 초청하였다.

고종황제는 1898년 6월 학부협판 민영찬(1874~1948)을 파리 만국박람회 준비를 총괄하는 '박물사무부원'에 임명했다. 

그런데 대한제국관 건설을 후원하기로 하였던 클레옹 남작이 돌연 사망했다.  

만국박람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박람회장에 지어야 하는 대한제국관 건축비 10만프랑과 박람회 기간동안 대지를 임대하는 비용 5.4만프랑이 필요했다. 

대한제국의 재정은 여력이 없었다. 대한제국의 참가가 무산될 뻔했으나 다행히 새로운 후원자가 나타났다.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당시 모습/대한제국관

후임자인 미므렐 백작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당초 설계를 축소했다. 그조차 공짜는 아니었다.

자금지원의 대가로 대한제국에서의 광업과 철도 사업권을 요구했고 고종 황제는 이를 승인했다. 경복궁 근정전을 모방한 대한제국관 건축은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전시관 건축을 위해 프랑스 건축가가 대한제국을 방문해 근정전을 둘러본 뒤 이를 바탕으로 건축한 전시관을 대한제국에 제공했다.

대한제국관에는 국악기들을 비롯해 도자기·화폐·무기·의상·그릇 등 왕실에서 쓰인 생활용구를 포함해 의식주와 관련한 다채로운 물품들이 전시되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도 인간동물원이 운영되었다. 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남미, 아시아의 인종, 풍물관까지 세워져 내부에서도 비판론이 제기되었다.

◆ 「직지」(直指), 세상 밖으로

파리박람회에 전시된 것 중 특별한 유물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직지)이다. 

'직지'는 당시 프랑스 외교관이었던 플랑시가 외교관으로 있으면서 구입했다. 플랑시는 두 차례에 걸려 13년간 조선에서 근무했다.

그가 '직지'를 수집한 시기나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파리박람회를 위해 1899년부터 1년간 휴가를 냈기에, 그 이전에 구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 외교관 플랑시 / 플랑시는 ,직지의 표지에 '주조된 글자로 인쇄된 책으로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책이다. 연대는 1377년'이라고 기록해 놓았다.(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직지'의 표지나 속지에 '주조된 글자로 인쇄된, 가장 오래된 한국책, 1377'이라고 쓰여있었다.

'직지'는 고려 후기 선승 백운 경한 스님이 역대 여러 부처와 고승의 대화, 편지 등을 중심으로 편찬한 책으로,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 앞선 1377년에 충북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됐다.

상·하 2권으로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국내에서 아직 원본이 발견되지 않았고, 하권만 유일하게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직지'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으로 희미하게나마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직지'는 이후 당대의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가 1911년 경매에서 단돈 180프랑(2006년 기준 약 64만원)에 낙찰받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1950년 기증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힘없고 가난한 극동의 작은 나라 전시관에 관람객의 발길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민영찬은 "우리 전시품이 하찮아 사람들이 보러 오지 않는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1900년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 폐막 후 수송비용이 없어 현지에  기증한 국악기들.

파리 만국박람회 폐막 후 전시품들은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지 못한다. 막대한 운송비 20만프랑을 마련할 여력이 없었던 탓에 프랑스의 다양한 박물관에 기증됐다. 

공예품은 프랑스 공예예술박물관으로 악기들은 프랑스 국립음악원의 악기박물관으로 이관되어 소장됐다. 

파리 만국박람회는 대한제국이 참가한 마지막 국제행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