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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콘텐츠(53)] 안평대군 또 하나의 꿈, '천년을 이대로 전하여'

관리자 2026-03-09 20:01:19
안견(安堅·생몰연대 미상)의 자는 가도(可度), 득수(得守) 이고 호는 현동자(玄洞子) 또는 주경(朱耕)이다. 안견은 도화원 소속으로 종6품인 선화(善畵)였다.

도화서는 원래 종6품인 선화가 최고의 자리로 그런 안견을 정4품 호군(護軍)으로 제수한 것을 보면 그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고, 또 세종이 그를 얼마나 총애하였는지 알 수 있다.  





충남 서산 지곡면의 안견 기념관과 기념비



안견의 그림은 양팽손(1488~1545), 신사임당(1504∼1551)을 비롯해 이징(1581~?), 김명국(1600~?), 김시(1524~1593) 등 후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 안견, 떠날 때를 알았다

안견과 안평대군의 관계는 실로 각별했다. 여러 해에 걸친 그들의 교유는 최상의 예술세계에서 예술을 사랑한 왕자와 실력있는 화가가 호흡을 맞춘 화려한 동행이었다.

안견은 이 적막한 황홀경을 그리며 안평대군에게 닥칠 죽음의 그림자에 대한 어떤 예감을 가졌던 것 같다. 안평대군은 꿈에 대해 안견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럿이 들어갔는데, 둘만 나왔다"고.

안견은 그 이야기를 듣고 안평대군을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정국의 불안함 속에서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려는 정난의 기운을 감지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안평대군에게 시시때때로 그림 요청을 받고 총애를 받고 있던 안견이 안평대군을 훌쩍 떠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안평대군이 아끼는 귀한 용매먹을 훔쳐서 도포자락에 넣었다.

안평대군은 당연히 사람을 불러 먹을 찾는 소동을 벌였고, 그 와중에 안견이 일어서며 먹을 떨어트리자, 이를 본 안평대군은 진노하여 안견을 내쳤고 다시는 집에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안견. ‘적벽도(赤壁圖)’. 조선 전기. 비단에 색. 161.2×101.8㎝. 국립중앙박물관(왼쪽). 아래는 인물 부분 확대 그림. 이 〈적벽도〉는 안견의 작품으로 전해오는 여러 그림들 중 가장 큰 작품이다.


안견은 이후 자신의 집에서 두문불출했고, 얼마 후 계유정난이 일어나 안평대군을 비롯해 그 집에 드나들던 사람들 대부분이 죽임당하거나 화를 입었다. 안평대군의 죽음 후에도 안견은 살아남았으며, 세조 치하의 왕실에서 화원으로 남아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안견은 안평대군의 몰락과 함께 도화원에서의 활동 입지가 상당히 좁아진다. 따라서 세조초에 이르러서는 어진이라든가 왕실 초상화 도사(圖寫)의 주도권이 최경(?~?)에게로 돌아가며, 안견은 산수화를 위주로 그린다. 

◆ 몽유도원도, 계유정난 이전 대자암에 봉헌

몽유도원도는 상당한 크기의 대형 서화(37.8×106.5cm)다. 오늘날까지 큰 파손 없이 전해진다는 사실이 의아스럽다. 계유정난의 화를 입지 않고, 난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안전한 장소에서 귀중하게 보관됐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한강 북쪽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여러 개의 봉우리로 이뤄진 대자산(210m)이 있다. 산 아래 골짜기에 태종이 13살의 나이로 요절한 넷째 아들 성녕대군(1405~1418)의 능을 수호하기 위해 지은 대자암(大慈庵)이라는 사찰이 있었다.
 






성령 대군의 묘와 사당인 대자사는 고양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어린 시절 성녕대군의 양아들로 입적된 이가 안평대군이다. 안평대군은 양아버지를 위해 사찰에 걸린 세 개의 편액(대자암, 해장전, 백화각)의 글씨를 쓰고, 대자암은 문종 대에 안평대군의 감독으로 중건됐다는 기록도 있다.

안평대군은 사직의 안녕을 위한 염원을 담은 여러 귀중품을 대자암에 봉헌했을 것이고 몽유도원도도 대자암에 봉헌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몽유도원도가 사라진 시기는 정난이 일어난 직후가 아니라 그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몽유도원도, 임진왜란 때 약탈당하다

임진왜란 시 조선을 침략한 규슈 가고시마의 호족 시마즈 요시히로(1535~1619)는 일본군의 제4진으로 출병해 전쟁초기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철원 등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대자암은 중종 조부터는 실록에 대자사(大慈寺)로 나오고, 명종실록에도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때까지 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자암은 임진왜란 와중에 1593년 1월 평양에서 퇴각하던 왜군과 명나라 구원병 간에 벌어진 벽제관 전투 때 불탔다는 설이 유력하다. 




'노량:죽음의 바다’에서 왜군 최고 지휘관 시마즈 요시히로를 연기한 배우 백윤식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 대자사에 머물기도 했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대자사에 보관돼 있던 몽유도원도를 약탈해 갔던 것이다. 

◆ 몽유도원도, 계유정난 이후 44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다

몽유도원도가 사라진 지 440년이 지난 1893년 일본 최남단 가고시마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 사는 시마즈 히사시루시(島津久徵)라는 사람이 소장한 그림에 일본 정부의 감사증(鑑査證·우수 예술품이라는 일본 정부의 인증서)이 발급된 것이다.

시마즈 히사시루시는 가고시마의 영주로 임진왜란에 출병한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의 후손이었다. 이후 몽유도원도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후손 시마즈 히사키(1819~?)에 보관되어 오다 1920년대 후반 쇼와공항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고미술시장에 나왔다가 소노다 사이지(園田才治)라는 사업가의 손에 들어갔다.

1929년 무렵 소노다 사이지는 교토 대학에서 퇴임한 나이토 고난(1866~1934) 교수를 찾아가 한 고서화를 보여주었다. 나이토 교수는 단번에 이 서화가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 임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1929년 9월 나이토오 코난이 「朝鮮 安堅の夢遊桃源圖」라는 한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데, 이것이 계유정난 이후 안평대군과 함께 사라진 몽유도원도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최초의 글이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931년 3월 22일 도쿄 우에노 공원에 설립된 도쿄부미술관에서 '조선명화전람회'가 열렸는데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일반인에게 처음으로 공개됐다. 소노다 사이지가 몽유도원도를 출품한 것이다. 

◆ 국내 환수할 수 있었지만...

이 전시회의 실무를 맡았던 오봉빈(1893~납북)은 일본으로 유출된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3만원에(약 90억~100억) 경매에 나왔다는 소식을 듣는다. 

간송 전형필에게 구입할것을 제안하였으나 간송이 당장 그 큰 돈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오봉빈은 일제로부터 몽유도원도를 되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몽유도원도를 조선 사람이 꼭 샀으면 좋겠다는 급박한 기고문을 동아일보에 실었다.





1931년 4월 12일 동아일보 광고


그러나 사겠다는 조선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1933년 몽유도원도는 일본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됐고 1934년에는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고적도보」에 첫 그림으로 수록됐다. 이 때의 소장가는 소노다 사이지였다.

1939년 5월에는 그 아들인 소노다 준을 소장자로 몽유도원도는 일본 국보로 지정받았다. 광복 이후 생활이 몹시 궁핍해진 소노다 준은 1947년에 도쿄의 고미술상 류센도(龍泉堂)에 매각했다.

류센도에서 구입할 당시 몽유도원도는 편액으로 되어 있고, 시문은 별도의 두루마기에 흐트려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표구과정에서 그림보다 3년이나 늦게 쓰인 안평대군의 시가 그림 맨 앞쪽에 배치되었다.





안평대군 글씨



1947년경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던 김재원(1909~1990) 박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구입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당시 어려운 국내 사정과 이런 저런 이유로 구입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1949년 다량의 고서화와 불상을 해외로 밀반출한 것으로 악명 높은 골동품상 장석구(張錫九)가 몽유도원도를 샀다며 국내에서 팔기 위하여 국내로 가져왔다. 하지만 엄청난 거금의 몽유도원도는 끝끝내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 몽유도원도, 유상환수시 가격은?

1950년 무렵 몽유도원도는 일본 덴리교 2대 교주인 나카야마 쇼젠(中山正善)이 구입해 덴리대학교 도서관에 수장되어 있다. 이후 몽유도원도는 일본의 법령 개정으로 하여 중요문화재로 변경된다. 그리고 오늘에 이른다.

그동안 한국에는 1986년, 1996년, 2009년 세 번 전시됐다. 1986년 8월 20일 국립중앙박물관이 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재개관할 때 보름간의 '조선초기서화전'에 전시된 것이 국내를 떠난 뒤 처음 공개된 것이다. 





지난 2009년 9월 말 일본에서 빌려 온 몽유도원도를 보기 위해 관람객들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10월 15일까지 전시할 예정이었으나, 몽유도원도의 반환 여론을 우려함인지 날짜도 채우지 못하고 20일 만인 9월 11일에 일본으로 가져갔다. 전시기간 동안 그 자리는 그냥 둘 수 없어 모조품을 전시해야만 했다.

그리고 1996년 겨울 호암미술관의 '조선전기국보전'에 두 달간 전시된 것이 두 번째이다. 2009년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 때 9일간 전시된 것이 세 번째이다. 

최근 몽유도원도의 반환에 관한 이야기가 언론에서 나왔다. 몽유도원도의 덴리대학 취득은 법적으로는 선의(善意)의 취득이다. 무상 환수는 불가능하다. 무상(無償) 환수가 아니라 유상(有償) 환수만이 가능하다. 

최종적으로 덴리대학이 매입한 가격을 현재 한화로 환산하면 400억 정도 된다고 하는데, 여기에 부대비용 100억을 합하면 필요한 예산은 최소한 500억 이상으로 추정된다.